말씀의 이삭 72

말씀의 이삭 | 벼랑의 끝자락에서

벼랑의 끝자락에서  《그림으로 보는 복음 묵상》 책에 담긴 성화로 전국 순 회전을 계획했으나 코로나 사태로 부득이하게 연기해야 만 했습니다. 모든 것이 멈춘 듯한 가슴 저린 때였지요. 1 년여 시간이 흐른 다음, 그동안 그렸던 주보 표지화를 비 롯해 새로운 작품 몇 점과 브론즈로 만든 14처로 ‘현존’이 라는 제목의 전시회를 준비했습니다. 인류 전체가 전례 없는 위기를 겪고 있는 고난의 순간에도 하느님께서 늘 함께하신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작품 속 200명의 군상을 그리던 중 갑자기 심한 갈증과 현기증을 느꼈습니다. 과로와 당뇨 체질 때문일 거라 가볍게 여기며 병원에 갔는데 췌장암이라는 청천벽 력 같은 진단을 받았습니다. 췌장 쪽은 초기에 발견하기 힘든데 1기에 발견된 것은 행운이라고 ..

세대간 소통 12:33:04

말씀의 이삭 | 그림으로 읽는 복음

그림으로 읽는 복음  하느님께서 돌리시는 거대한 수레바퀴 속에 작은 점들 이 모여 우주를 밝힙니다. 제가 그림을 시작한 것도, 인체 를 그리게 된 것도, 우연히 흙 작업을 하게 된 것도 그분 의 섬세한 계획이 있었기에 가능했음을 깨닫습니다. 묵주 기도 책을 시작으로 사순 묵상, 실크로드를 비롯해 인도, 아프리카 여행길, 사도 바오로, 이육사, 에밀 타케 신부님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에 이르기까지 무던히도 다 양한 주제를 담은 책 작업으로 주님께서는 저를 혹독하게 훈련시키셨습니다. 그림과 조각으로 쉼 없이 달린 저는 마침내 신약성경 을 주제로 3년에 걸쳐 여러 교구 주보 표지에 들어갈 그 림을 그리게 되었습니다. 그림으로 읽는 복음! 말씀 자체 이신 주님을 담아내는 성경 속 여행은 방대한 대서사시였 ..

세대간 소통 2025.03.18

말씀의 이삭 | 어머니의 묵주기도

어머니의 묵주기도  고즈넉한 새벽, 경주 남산 자락의 화실 창에도 봄기운 이 내립니다. 일흔의 나이에도 어머니가 그리운 것은 제 가 8남매 중 막내여서일까요? 그리움의 자락을 잡고 제 삶에서 사랑의 근원이 되어 주셨던 어머니 얘기를 시작하 려 합니다. 어머니는 관절염으로 30년 동안 걸어 다닐 수 없으셨 기에 삶 자체가 온통 기도였습니다. 결혼 조건으로 남편 과 한 첫 번째 약속이 엄마랑 함께 사는 것이었죠. 일찍 부모님을 여윈 남편도 아이들에게 할머니 사랑을 느끼게 해 주고 싶은 열망이 컸던 터라 어머니는 저희 집의 구심 점이 되셨습니다. 성모상 앞에 촛불을 밝히고 미소를 지 으며 기도하시던 어머니의 방은 작은 성소였지요. 제가 어리던 시절 23명이나 되는 대가족을 건사하시 며, 그 작은 체구로 모든 ..

세대간 소통 2025.03.11

말씀의 이삭 | 메테오라에서 만난 예수님

메테오라에서 만난 예수님  누구에게나 쿵쿵 가슴 뛰게 했던 일이 하나쯤은 있을 것입니다. 저에게는 15년 전, 사도 바오로의 길을 따라 그리스와 튀르키예로 떠났던 성지순례가 그랬습니다. 성 지 가운데에서도 가장 가슴 뛰었던 장소는 그리스의 메테 오라였습니다. 황량한 벌판에 돌연 솟아오른 듯한 거대하 고도 기묘한 바위 기둥들이 눈 앞에 펼쳐지는 순간 심장 이 뛰고 피가 용솟음치는 것 같았습니다. 좁은 바위 위에 아찔하게 세워져 있거나 깍아지른 절벽 위에 붙어 있는 수도원은 경이롭고 신비롭기까지 했습니다. 바위 사이 구 름다리 형태의 계단을 올라 마주한 트리니티 수도원은 짜 릿함의 극치였습니다. 아름다운 이콘화로 꾸며진 성당 내 부는 도저히 인간의 힘으로 만들 수 없는 신적인 공간으 로 다가왔습니다. ‘왜 ..

세대간 소통 2025.03.04

말씀의 이삭 | 예수님을 몰랐더라면

예수님을 몰랐더라면   한국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저에게 청천벽력 같은 선 고가 떨어졌습니다. ‘제1형 당뇨병’이라는 선고였죠. 췌장 에서 인슐린을 제대로 생성하지 못하는 병을 말하는데 유 년기에 많이 발생하여 ‘소아 당뇨’라고도 불리고, ‘인슐린 의존성 당뇨병’이라고도 불립니다. 유전도 아니고 정확한 원인이 밝혀진 바 없는 이 병을 처음 선고받았을 때는 눈 앞이 깜깜했습니다. 당시 저의 나이는 25살이었습니다. 한창 하고 싶은 일도 많았는데 이런 병에 걸리다니! 받아 들이기 힘들었습니다. 많이 먹거나, 술, 담배를 하거나, 생활 습관이 문제거나, 운동을 하지 않는 것도 아닌데 왜 이런 병에 걸렸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평생 인슐 린 주사를 맞아야 하고, 음식을 조절하며 살아야 하고, 합 병증을..

세대간 소통 2025.02.25

말씀의 이삭 | 사람 사이의 하느님

사람 사이의 하느님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통해 저와 함께하심을 드러내 보 여 주시곤 합니다. 아내에게 반해 한국으로 온 저는 춘천에서 공부를 마 친 후, 취업 자리를 알아보기 시작했습니다. 다행히 주한 이탈리아 대사관에서 인턴으로 일할 기회가 주어졌습니 다. 하지만 주한 이탈리아 대사관이 있는 서울은 집값이 너무 비쌌습니다. 학생이었던 저에게 모아 놓은 돈이 있 을 리 없었죠. 막막하기만 하던 그때, 춘천에서 같이 공부 하던 친구가 서울에 사는 이모 댁에서 지내게 해 주었습 니다. 저는 친구도 친구지만 이모님이 이해되지 않았습니 다. 조카랑 함께 지내는 것도 아니고 한 번도 본 적 없는 ‘조카 친구’를 받아주시다니! ‘왜?’라는 질문이 절로 나왔 습니다. 하지만 제가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인가요? 당장 ..

세대간 소통 2025.02.18

말씀의 이삭 | 하느님의 빅 픽처

하느님의 빅 픽처  돌아보니 인생의 절반 가까이 한국에서 살고 있습니 다. 곧 있으면 반평생을 한국에서 살았다고 할 수 있겠네 요. 솔직히, 한국에 이렇게 오래 살 생각은 없었습니다. 고등학생 때, 저는 물리학, 화학, 생명과학 등 과학 분야 에 관심이 많아서 과학 고등학교에 다녔습니다. 이탈리아 는 낮 12시면 학교 수업이 끝나기 때문에 혼자만의 시간 이 아주 많습니다. 그 시간에 저는 주로 축구를 하거나 베 이스 기타를 연주했는데, 특히 책을 많이 읽었습니다. 다 양한 분야를 책으로 접하고 습득했죠. 그러다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진로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는데, 당시에 저는 오만하게도 혼자 공부해서 안 되는 공부는 거의 없 다고 생각했습니다. 무엇이든 책을 통해 스스로 배울 수 있다고 생각했죠. 이 ..

세대간 소통 2025.02.11

말씀의 이삭 | 스며들 듯 오신 하느님

스며들 듯 오신 하느님  안녕하세요? 이탈리아에서 태어나 한국에 산 지 올해 로 18년 차 되는 ‘알베르토 몬디’입니다. 많은 분이 아시 듯 이탈리아 국민은 아주 오래전부터 가톨릭을 믿어 왔습 니다. 여전히 한국 문화에 불교와 유교 문화가 남아있듯, 이탈리아 문화에는 가톨릭 문화가 짙게 묻어 있습니다. 그중에 대표적인 것이 바로 ‘이름’입니다. 한국 가톨릭 신자분에게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은 “알베르 토 씨는 세례명이 뭐예요?”입니다. 처음에 이 질문을 받았 을 때는 세례명이 무엇인지 몰라서 당황했던 기억이 납니 다. 이탈리아에서는 세례명이라는 것이 따로 없기 때문이 죠. 아이가 태어나면 대부분의 부모님은 성인(聖人) 이름 중 에 하나를 정해서 이름으로 지어줍니다. 그러니 이탈리아 사람에게는 이름이 곧 세..

세대간 소통 2025.02.04

말씀의 이삭 | 내가 너를 사막으로 불러내 너에게 사랑을 속삭여 주리라

내가 너를 사막으로 불러내 너에게 사랑을 속삭여 주리라  안토파가스타는 아타카마 사막 한켠에 세워진 도시입 니다. 사막과 바다가 접해 있어 비할 수 없이 아름답지만, 척박한 바위와 흙모래 위에 세워졌기에 낯설고 삭막한 곳 이기도 합니다. 이 공동체에 저를 파견하면서 원장 수녀 님이 하신 말씀은, 무엇보다도 먼저 건강하게 적응하기 위해 마음을 쓰라는 당부였습니다. 수녀님의 염려와는 달 리 부드러운 선과 다양한 색깔로 시시각각 변하며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는 사막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저의 삶은 매 순간 행복한 날들이었습니다. 저는 공동체에서 서로 연배가 비슷한 두 분의 칠레 수 녀님과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그분들은 40년을 넘게 함 께 살아오면서 서로를 신뢰하고 있다는 점은 물론이고 삶 의 체험도 비슷하여..

세대간 소통 2025.01.28

말씀의 이삭 | 다니엘이라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다니엘이라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10여 년 전, 안토파가스타에서 처음 그 아이를 알게 되 었는데, 그때 다니엘의 나이는 네 살이었습니다. 호기심으 로 반짝이는 두 눈에, 똘똘함이 가득한 귀여운 꼬마였습니 다. 다니엘은 일주일에 한두 번 할머니의 손을 잡고 바오로 딸 서원에 찾아와 수녀님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그림책도 보며 우리에게 아주 반가운 손님이 되었습니다. 직장 생활 을 하는 엄마와 아빠 때문에 할머니의 손에 자란 다니엘은 말하는 폼이나 생각하는 것이 또래들과는 달리 의젓하고 거침이 없었습니다. 한동안 뜸하던 그가 어느 날, “수녀님, 저 복사됐어요.”라며 찾아왔습니다. 빛나는 눈엔 기쁨이 가 득 찼습니다. 본당 신부님은 매일 미사에 오던 다니엘에게 특별히 복사단 입단을 허락하셨고, 다니엘은 신자들..

세대간 소통 2025.01.21

말씀의 이삭 | 빅토르 할아버지

빅토르 할아버지  빅토르 할아버지는 길에서 사시는 분이었습니다. 생김 새조차도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길게 헝클어진 머리와 수염, 큰 키에 바짝 마른 두 발에는 신발도 없었습니다. 70세는 족히 넘어 보이는 할아버지는 피노체트 독재 정 권 시절 정보 경찰 출신으로 민주 인사들에게 고문을 가 하던 경찰이었다는 것, 그 후유증으로 정신 이상자가 되 어 10년을 넘게 떠돌아다니며 지낸다는 정도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할아버지는 같은 자리에 조용히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 을 쳐다보며 웃기도 하고 혼자 중얼거리기도 했습니다. 가끔 기분이 나빠지면 소리를 지르거나, 지나가는 이들 을 향해 주먹을 휘두르는 통에 다른 노숙인들과 달리 친 구도, 강아지도 할아버지를 가까이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저를 보면 “중국 공산주의자..

세대간 소통 2025.01.14

말씀의 이삭 | 칠레 남쪽 사람들은 친절하고 사랑이 넘칩니다

칠레 남쪽 사람들은 친절하고 사랑이 넘칩니다  20년 전 칠레에 도착한 후 5개월의 스페인어 공부를 마치고 콘셉시온 공동체로 파견을 받았습니다. 콘셉시온 은 산티아고에서 500킬로미터 떨어진 남쪽의 도시입니 다. 시원한 맑은 공기에 잘 정돈된 도시는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웠습니다. 이곳에서 저는 두 명의 칠레 수녀님, 한 명의 이탈리아 수녀님과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대학이 여럿 모여있는 콘셉시온은 청년 사목과 함께 성소 사목을 하기에 좋은 환경이었고, 다른 지역에 비해 사제와 수도자 성소도 많은 지역입니다. 휴가철, 칠레 교 회 젊은이들은 한 지역을 찾아 지역 주민들과 함께 신앙 체험을 나누는데, 이를 미션이라 합니다. 우리 수도회도 성소 사목의 일환으로 산티아고의 젊은이들과 함께 콘셉 시온 가까이 ‘..

세대간 소통 2025.01.07

말씀의 이삭 | 이유 있는 시련, 늦은 감사

이유 있는 시련, 늦은 감사  저의 시작은 화려했습니다. 딱히 무명 시절이라고 할 것도 없이 어린 나이에 데뷔해서 모델로서도, 배우로서도 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작은 역할이 라도 얻기 위해 전전긍긍하는 간절함이 무엇인지 알지 못 한 채, 꽤 오랫동안 연예계 활동을 했습니다. 그때는 그것 이 당연하다고까지 여기며 ‘이 역할은 분량이 너무 적다, 이 역할은 내가 돋보이지 않는다.’ 등의 이유로 들어오는 작품을 거절하는 일도 잦았습니다. 그런 저의 오만함이 흔 들리기 시작한 것은 데뷔한 지 십여 년 정도 흘렀을 때였 습니다. 저에게 들어오는 작품 수가 현저히 줄고 있었습니 다. 작품이 준다는 건, 더 이상 배우로서 매력이 없다는 뜻 과 같다는 생각에 자괴감이 들었습니다. 그토록 높았던 자 ..

세대간 소통 2024.12.31

말씀의 이삭 | 기도로 이어지는 사랑

기도로 이어지는 사랑  제가 하느님을 알고 지금껏 그분 곁에 머물러 있는 것은 사실 따지고 보면 다 저희 외할머니 덕분입니다. 할머니에 대한 기억을 헤아려보면, 방 한쪽에서 열심히 기도드리시 던 모습이 제일 먼저 떠오릅니다. 친척들이 저희 집에 한 꺼번에 올 일이 있어도, 항상 할머니는 저녁에 함께 기도 하자며 가족들을 모으셨었습니다. 두런두런 둘러앉아 할 머니와 함께 묵주기도를 드리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또, 그렇게 묵주기도가 끝나고 나면 다시금 방에 홀로 들어가 서 기도를 이어가시던 모습까지도요. 할머니는 항상 기도하며 사신다는 것이 삶에서 느껴지 는 분이기도 하셨습니다. 너무나 인자하신 분이셨고, 저 는 끝내 할머니가 화를 내시는 모습을 한 번도 보지 못했 습니다. 그 어떤 실수를 하고 주저앉아 있..

세대간 소통 2024.12.24

말씀의 이삭 | 내가 성당을 찾는 이유

내가 성당을 찾는 이유  저는 자존심이 너무 강해서 그런지, 다른 사람들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에 익숙지 않습니다. 힘들어도 괜 찮은 척하고, 슬퍼도 행복한 척하며 아픔을 어떻게든 숨 기려고 합니다.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이는 것인데, 왜 그렇게 싫을까요. 아마 저에게는 두려움이 있 는 것 같습니다. 부족한 점을 솔직하게 드러내 보였다가 다른 사람들에게 약점 잡히면 어떡하나 하는 두려움, 혹 시 무시라도 당하면 어떡하나 하는 두려움, 그런 수많은 두려움이 제 안에 웅크리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여전히 그런 두려움 속에서 온전히 빠져나왔다고 자신 하기는 어렵지만, 요즘은 그런 견고한 제 안의 장벽이 조 금씩 허물어지는 것을 느낍니다. 성당에 다시 나오기 시작 하면서부터 시작된 일입니다. ..

세대간 소통 2024.1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