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대간 소통

말씀의 이삭 | 어머니의 묵주기도

松竹/김철이 2025. 3. 11. 12:03

어머니의 묵주기도

 

 

고즈넉한 새벽, 경주 남산 자락의 화실 창에도 봄기운 이 내립니다. 일흔의 나이에도 어머니가 그리운 것은 제 가 8남매 중 막내여서일까요? 그리움의 자락을 잡고 제 삶에서 사랑의 근원이 되어 주셨던 어머니 얘기를 시작하 려 합니다.

 

어머니는 관절염으로 30년 동안 걸어 다닐 수 없으셨 기에 삶 자체가 온통 기도였습니다. 결혼 조건으로 남편 과 한 첫 번째 약속이 엄마랑 함께 사는 것이었죠. 일찍 부모님을 여윈 남편도 아이들에게 할머니 사랑을 느끼게 해 주고 싶은 열망이 컸던 터라 어머니는 저희 집의 구심 점이 되셨습니다. 성모상 앞에 촛불을 밝히고 미소를 지 으며 기도하시던 어머니의 방은 작은 성소였지요.

 

제가 어리던 시절 23명이나 되는 대가족을 건사하시 며, 그 작은 체구로 모든 식구에게 사랑의 밀알이 되셨던 어머니를 떠올리면 눈시울이 뜨겁습니다. 끼니마다 두레 상이 6개나 되니 매일매일이 잔칫집이었지요. 그 작으신 체구로 김장하실 때는 500포기 배추로 산을 이루시곤 하 여 입을 다물 수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그 시절에는 왜 그 리 걸인들이 많았는지요. 깡통을 든 걸인들을 한 번도 그 냥 보내지 않으셨던 어머니께서는 과로로 여러 번 쓰러지 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때마다 아름다운 여인이 나타나 아 직 때가 아니라고 말씀해 주시는 목소리를 들으며 의식을 되찾으셨다니, 묵주를 손에서 놓지 않던 분이셨던 어머니 를 아마도 성모님께서 다시 살리셨던 것 같아요.

 

가난한 신혼 시절, 어머니는 큰 규모의 미술 대전 공모 를 준비하는 남편 등 뒤에서 “불쌍한 우리 사위, 세계에서 제일 가는 화가 되게 해 달라.”고 어린애처럼 기도하셨습 니다. 한국 최고도 아니고 세계 최고 화가라니 너무 심하다 고 말씀드리면, “아니다, 될 만한 그릇이기에 하는 거다.”고 괜스레 역정을 내곤 하셨지요. 샌프란시스코의 아시안 뮤 지엄에 남편이 그린 500호의 금강전도가 걸렸을 때, 저는 기어코 생전에 엄마가 바치신 기도의 응답을 보았습니다.

 

한평생 기도로 밑거름이 되어 주셨던 어머니의 죽음 은 제가 성화를 그리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단출한 어 머니의 유품을 정리하면서 묵주기도 책에 메모하신 삐뚤 빼뚤한 구어체의 어머니 글씨를 본 순간, 그 작은 책자가 새로운 묵주기도 책을 만들라는 소명처럼 느껴졌습니다. 저 역시도 긴 세월 묵주기도를 바치면서 ‘우리 그림으로 된 묵주기도 책은 왜 없을까?’ 하고 늘 생각하던 차였습 니다. 그리고 어머니의 기도 위에 딸의 기도가, 딸의 기도 위에 손녀의 기도가 차곡차곡 포개지는, 대를 이어 사용 할 수 있는 가죽 장정의 묵주기도 책! 아, 정말 근사할 것 같았습니다. 평생 자손들을 위해 성모님께 간구하신 어머 니의 묵주기도가 이제는 이 딸의 손을 통해 성모님께 봉 헌되는오묘한 섭리에 찬미를 드리며 오늘도 어머니의 기 도에 제 기도를 포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