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토르 할아버지
빅토르 할아버지는 길에서 사시는 분이었습니다. 생김 새조차도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길게 헝클어진 머리와 수염, 큰 키에 바짝 마른 두 발에는 신발도 없었습니다. 70세는 족히 넘어 보이는 할아버지는 피노체트 독재 정 권 시절 정보 경찰 출신으로 민주 인사들에게 고문을 가 하던 경찰이었다는 것, 그 후유증으로 정신 이상자가 되 어 10년을 넘게 떠돌아다니며 지낸다는 정도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할아버지는 같은 자리에 조용히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 을 쳐다보며 웃기도 하고 혼자 중얼거리기도 했습니다. 가끔 기분이 나빠지면 소리를 지르거나, 지나가는 이들 을 향해 주먹을 휘두르는 통에 다른 노숙인들과 달리 친 구도, 강아지도 할아버지를 가까이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저를 보면 “중국 공산주의자!”라며 소리를 질렀습니다. 어 느 추운 겨울날, 길에 앉아 햇볕을 쬐고 있던 할아버지에 게 따뜻한 커피와 햄버거를 건넸습니다. 이날부터 저는 빅토르 할아버지와 친구가 되었습니다. 지나가다가 만나 면 웃으며 인사도 건네셨습니다. 바오로딸 서점 앞을 지 나갈 땐 큰 소리로 저를 부릅니다. 어떤 날엔 사람들에게 얻은 동전 한 움큼을 서점에 던져주고, 마시던 콜라와 감 자튀김을 문 앞에 놓고 가면서 크게 웃기도 합니다. 자신 의 것을 나눌 줄 아는 할아버지에게 가끔씩 커피와 빵을 사드리면 거부하지 않고 활짝 웃습니다. 하지만 기분이 별로인 날에는 시원하게 욕을 날리고 가십니다.
할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들은 것은 그 이듬해 겨울이 었습니다. 연세도 많았지만, 영양실조에 폐렴이 겹쳐 갑 자기 돌아가셨다는 것입니다. 이제 할아버지가 더 이상 추위에 떨지 않아도, 자신의 죄에 짓눌려 고통받지 않아 도 된다고 생각하니 차라리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 다. 그러나 한편, 그 오랜 시간 한겨울의 추위와 뜨거운 햇볕, 배고픔과 외로움을 견디며 죽음에 이르도록 스스로 에게 형벌을 가하며 살아간 한 사람의 고통이 너무나 아 프게 느껴졌습니다. 또한 누구도 그의 죽음에 대해 말하 지 않는 현실이 너무나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한 개인이 거대한 국가의 폭력에 휩쓸려 처참한 삶을 살아야 했던 것은 누구의 책임일까요? 30여 년 전, 칠레 는 민주주의를 되찾았지만, 그 독재자는 천수를 누렸고, 그의 후손들은 여전히 풍요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빅토르 할아버지처럼 불의에 동참한 이들이 이 세상을 떠 난 후, 마치 모든 잘못들이 그들과 함께 사라져 버린 양, 영원히 묻히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단지 몇몇 개인의 생각이 아니길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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