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랑의 끝자락에서
《그림으로 보는 복음 묵상》 책에 담긴 성화로 전국 순 회전을 계획했으나 코로나 사태로 부득이하게 연기해야 만 했습니다. 모든 것이 멈춘 듯한 가슴 저린 때였지요. 1 년여 시간이 흐른 다음, 그동안 그렸던 주보 표지화를 비 롯해 새로운 작품 몇 점과 브론즈로 만든 14처로 ‘현존’이 라는 제목의 전시회를 준비했습니다. 인류 전체가 전례 없는 위기를 겪고 있는 고난의 순간에도 하느님께서 늘 함께하신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작품 속 200명의 군상을 그리던 중 갑자기 심한 갈증과 현기증을 느꼈습니다. 과로와 당뇨 체질 때문일 거라 가볍게 여기며 병원에 갔는데 췌장암이라는 청천벽 력 같은 진단을 받았습니다. 췌장 쪽은 초기에 발견하기 힘든데 1기에 발견된 것은 행운이라고 주변에서 말했습 니다. 주인공 없는 전시회는 예정대로 열리고, 가족들은 놀란 가슴을 안고 저를 살리기 위해 동분서주 뛰어다녔으 며, 휘몰아치듯 저의 병원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복강 경으로 수술을 받고 네 가지 항암제 중 마지막 주사는 44 시간이나 맞아야 했습니다. 약이 몸속으로 들어오면 울렁 이는 구토 때문에 휴지통을 껴안고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된 채 노란 쓴 물까지 쏟아냈습니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 는 아픔과 외로움으로 얼마나 긴 밤들을 하얗게 보냈는지 요. 12차례에 걸쳐 항암 치료를 받던 때는 제 삶이 바닥을 치며 가장 힘들었던 순간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놓아버 린 체념의 시간, 울기에도 지쳐버린 체력, 받아들이기 힘 든 현실 앞에서 절망하며 주님 앞에 섰습니다. 주님의 일 을 한다면서 제 이름을 내세운 것은 아닌지 번민했습니 다. 지키지 못한 약속, 받기만 한 마음의 빚, 낭비, 질투, 거짓, 양심의 가책…. 온갖 마음의 찌꺼기들이 저를 노려 보고 있었습니다.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벼랑의 끝자락에 서 저는 모든 것을 내려놓았습니다. 비우고 또 비우고, 낮 아지고 또 낮아지고…. 어린아이처럼 바보가 되었습니다.
사도 바오로 순례길을 함께했던 93세의 소티리오스 정 교회 대주교님께서도 같은 시기에 항암 치료를 받고 계시 다는 소식을 듣고, 왠지 그분과 마지막 만남이 될 것 같아 아픈 몸을 이끌고 가평 수도원으로 갔습니다. 고통스러 울 때마다 십자가의 주님의 고통을 떠올리며 아픔을 봉헌 하고, 그 순간 주님의 은총을 체험해 보라고 위로해 주셨 습니다. 당신과 더 가까워지라고 애타게 부르시는 그분의 사랑을 받아들임은 순교의 정신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 다. 소중한 말씀을 마음에 품고 링거에서 떨어지는 항암 제 한 방울 한 방울을 연옥 영혼의 목마름을 채워주는 기 도 방울로 바치니 아픔이 점점 희석되어 갔습니다. 고난은 고난을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아 픔 속에서 기쁨이 자리하는 순간 주님께서는 제 손을 더욱 강하게 잡아주셨습니다. 작은 어떤 것도 예전과 달리 보이 는 세상에서 감사로 다시 일어설 힘을 얻습니다. 지금, 아픔 속에서 절망하고 계신 분들께 저의 초라한 글을 바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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