松竹일반시 700

하루

하루 松竹 김철이 오늘이란 이름표 달고 내일이란 삶의 둥지 속으로 소리 소문도 없이 데려다 놓는 생의 동반자 눈에도 차지 않고 품에도 들지 않는 임이라 부르리까 생의 살점을 뜯어 갈 철천지원수라 부르리까 시간의 공간을 빌려 창살 없는 감옥 속에 인생을 가둬놓고 세월의 채찍질로 저승 몰이 여념 없네 뉘라서 막을 손가 하루의 권세 어제도 오늘도 또 내일도 짜진 틀 안에 죽어간 순교자 될 테지

松竹일반시 2023.10.01

인생 노래

인생 노래 松竹 김철이 세상 그 누가 지었나, 심오하고 미묘한 그 노래 가락마다 기쁨이요 소절마다 아픔이니 추리소설 같고 모노드라마 같다더라 한 박자에 웃고 두 리듬에 우니 관객 없는 무명의 무대 위 단역의 풍자극 같구나 때론 엇박자에 슬퍼하고 때론 같음표에 박장대소 거두절미 어차피 한번 부를 노래라면 비곡(悲曲) 말고 희곡(喜曲)만 쟁여 불렀으면

松竹일반시 2023.09.24

추석

추석 松竹 김철이 팔월 열나흘 밤은 깊어만 가는데 덜 여문 대보름달은 가정마다 기웃기웃 엿보더라 재촉하는 이 하나 없어도 송편 빚는 아낙들 등골엔 덜 가신 더위 탓에 구슬땀이 미끄럼을 타더군 오곡백과 차례상에 정결한데 제기 위에 나체로 누운 송편은 조상 손길에 앞서 철부지 손길 막무가내 유혹해 댔지! 여자애들 공깃돌이 폴짝폴짝 남자애들 씨름판이 들썩들썩 총각들 승경도놀이 해가 저물고 처녀들 강강술래로 중추절 밤은 저문다.

松竹일반시 2023.09.14

우정이란

우정이란 松竹 김철이 구름은 뭉게뭉게 신선인 양 시선은 멀리 두고 산봉우리 걸터앉아 잡나무 잡새 산 벌레 산짐승들 차별 없이 비바람 맞을세라 비바람 걸음 앞서 일러주고 먼 봉우리 흘러갔다 되돌아 흘러온다. 샘물은 송골송골 잔돌 큰 돌 가리지 않고 돌 틈에서 어깨를 걸고 걸어 솟고 솟아 짱돌 수수돌 자갈돌 석돌 구별 없이 씻어주며 헌신으로 흐르다가 돌 틈으로 되돌아 들어갔다 다시금 헌신으로 솟아나 희생으로 흘러간다. 세월은 흐르고 흘러서 뭇 인생 끝을 향해 줄달음치지만 우정이란 두 글자 따뜻한 피가 흐르는 가슴팍 차별 없고 구별 없이 영생을 누림이니라

松竹일반시 2023.09.10

벌초

벌초 松竹 김철이 이 빠지고 날 무딘 밀 낫 하나 손에 든 채 부모님 연년이 누워 계신 종중산을 종종걸음 오른다. 자주 찾지 못해 송구한 심정 감출 길 없는데 소나무 가지 걸터앉은 산까치 부부 나무라듯 짖더군 그 사이 훌쩍 웃자란 머리털 손톱 발톱 말끔히 깎아드리려니 눈물이 봉분을 덮더라 부모님 영전 술 한 잔 쳐서 올리고 절 한 자락 넙죽 올리니 이별주에 취한 듯 서산 노을이 금세 불콰하다.

松竹일반시 2023.09.07

물 2

물 2 松竹 김철이 누가 뭐래도 무색이요 누가 우겨도 무향인데 원대한 꿈을 품고 겸손한 걸음 아래로만 걷는다. 길이 없어도 한 마디 불평 없이 뒤도 옆도 돌아보지 않고 겸허한 행적 낮추어 흐르더라 가슴 타는 논밭도 가로질러 축이고 목 타는 초목들도 뿌리 속까지 촉촉이 적시네 때론 분노한 부정이 되고 때론 울분한 모정이 돼도 뭇 생명 품어 흐를 내리사랑 영원하리

松竹일반시 2023.09.03

물 1

물 1 松竹 김철이 물은 언제든 다툼의 씨앗을 빚지 않고 세상 누구와도 다툼이 없으라. 두서넛 달 혹한에 발이 묶여도 원망하지 않고 감사의 걸음 춘삼월 부초를 엎는다. 드높은 하늘 무작정 등 떠밀어도 제 어미 제 새끼 사랑으로 품듯 물속 생명체 품어 흐른다. 부평초 신세 한순간 위로받지 못해도 마냥 흐르는 절개, 꺾지 않고 만삭의 계절 업어 도도히 거닌다. 동장군 칼바람 흘러야만 할 물길 통째 가로막아도 굴하지 않고 쉬었다 가고 돌아서 간다.

松竹일반시 2023.08.27

산에, 산에

산에, 산에 松竹 김철이 그대 품에 안기어 도란도란 세파에 병든 마음을 풀어놓고 해 질 녘 그대 홀로 남긴 채 돌아갑니다 금낭화꽃 늘어서서 배웅하고 몇 걸음 앞서 골골대던 물소리 어둑어둑 초저녁 계곡 길 열며 인생들 삶터로 되돌아갑니다 세상살이 살아가며 인생살이 늙어가며 버거운 삶 지칠 때면 먼발치 멍하니 그대를 바라다보고 정녕 그리울 때면 그댈 찾아 잠시 안식을 누리지요 그렇게 저렇게 살다가 그대를 영영 마주할 수 없는 날 그대 등성이 편히 누워 그대 닮은 그대로 되살 수 있을지

松竹일반시 2023.08.20

시묘살이

시묘살이 松竹 김철이 부모님 이별한 지 이십여 년 모습과 표정은 봄날 아지랑인데 이름은 영혼 속 껌딱지 지워질 줄 모르더라 이승과 저승의 거리 몇 리나 되길래 내 아비 내 어미는 밤이면 밤마다 밤마실 오가실까. 허리도 굽지 않았고 머리엔 서리도 내리지 않았네 반백이 넘은 날 보고 아들자식이라 부르니 내 아비 내 어미 계부 계모인 줄 알겠네 그래도 좋소이다, 살아생전 효도 못 한 아들자식 저승 가는 그날까지 영혼 속에 초막 짓고 시묘살이할 터이니 밤길 조심 하사 찾아오소서

松竹일반시 2023.08.13

소나기

소나기 松竹 김철이 위세도 당당해라 천둥 번개 등에 업고 한바탕 고래고래 쓸고 간 언저리가 은혜롭다. 갖은 잡새 울음에 찌든, 초목들 잔가지 하나 차별 없이 파릇파릇 깔끔히도 샤워시키더라 뾰로통한 하늘은 둥개둥개 드높이 밀어 올리고 무지개 오작교 곱게 놓더군 먼 산 먼 계곡 큰소리로 불러다 떠듬떠듬 시상 떠올리던 내 코앞에 단숨에 옮겨다 놓았지!

松竹일반시 2023.08.10

꽃불

꽃불 松竹 김철이 “불이야!” “어디?” “어디?” 뭇시선이 머문 곳 산등성이 불은 산을 통째 삼키려는데 남녀노소 입질에 오르내리는 건 외마디 환성뿐 누구 하나 불 끌 생각이 없다. 화마는 절정에 이르러 산자락을 타고 오르더니 산골짝 계곡마다 퍼질러 앉아 메아리 인파를 부른다. 꾀꼬리 울고 잔대꽃 푸르게 필 무렵 진달래 꽃불은 생을 다한 깜부기불로 남겠지

松竹일반시 2023.08.06

복날

복날 松竹 김철이 열대야 찜통더위 상대 삼아 밤새 내내 엎치락뒤치락 승부 없는 씨름을 하고 게슴츠레 앉은 밥상머리 속살 훤히 드러낸 육계 유혹을 하네 잘 익었나, 설익었나 두들기는 손놀림이 무색하게 보름달만 한 수박 한 통이 거실 바닥 홀딱 벗고 나뒹굴더군 아무리 이열치열이라지만 냉방에 배 깔고 누워도 구슬땀이 소나긴데 미꾸라지 출타한 추어탕 뚝배기 아래턱을 치받는다. 어느 지방 출신인지 몰라도 발그레 홍조 띤 복숭아 자두가 맛 자랑 한껏 부풀리더니 씨만 하나 덜렁 남기더라

松竹일반시 2023.08.03

인생은 하루살이

인생은 하루살이 松竹 김철이 뉘라서 모를쏘냐 금은보화 곡간에 쌓는 기쁨 인생사 소풍 걸음 맨발 벗고 맨몸으로 홀로 왔던 외길이니 나누고 정 베풀어 돌아 돌아 길에 꽃길 삼아 걸어가소 인생 백 년을 산다 해도 아픈 날과 슬픈 날을 뺄셈으로 빼고 나면 성한 날도 기쁜 날도 한순간 물거품인데 하루인들 헛살리까 소풍 온 기념으로 마음 문 자물쇠 끌러 놓고 슬픈 이도 아픈 이도 축복으로 맞이하세 앞앞이 복되어 소나기로 내릴 인생살이 길목에서

松竹일반시 2023.07.30

춘계전쟁(春季戰爭)

춘계전쟁(春季戰爭) 松竹 김철이 벙커 속 초록 신병들이 적군도 없는 전투의 파병을 위해 하나둘 머리를 내밀어 새파란 눈으로 적진을 응시한다. 폭음 없는 폭파는 삼천리 금수강산을 뒤엎고 시절의 패잔병 꽃샘추위 엳아홉 달 작전상 후퇴를 한다. 지하 참호 속에 은폐 중이던 동면 동물들 일제히 승전보를 전하고 얼음 되어 억류당하던 물은 자유 찾아 드넓은 물의 세계로 간다. 또 다른 전선의 승전을 위해 민들레 홀씨 특전병 되어 꽃바람 군 수송기 삼아 돌아오지 못할 정찰을 떠난다.

松竹일반시 2023.07.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