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제의 공간 1254

정치적 신(Deus Politicus)을 찾아 열두 곡 | 이병호 빈첸시오 주교님(전 전주교구장)

[특별기고] 4.10 총선 앞두고 (클릭):http://www.catholic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33744 정치적 신(Deus Politicus)을 찾아 열두 곡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1“부부 사이의 관계는 정치입니다.” -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제대로 된 정치는 사랑의 가장 좋은 표현입니다.” – 프란치스코 교황정치가 무엇이길래?정치Politics는 Polis 곧 ‘여럿’두 사람 www.catholicnews.co.kr

사제의 공간 2024.04.08

부활하신 예수님, 저도 당신을 만나고 싶습니다 | 오종진 베드로 신부님(천안오룡동 주임)

부활하신 예수님, 저도 당신을 만나고 싶습니다 오종진 베드로 신부님(천안오룡동 주임) 모든 것을 버리고 예 수님을 따라나섰던 제 자들에게 예수님은 삶 의 모든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아들 이라 믿었던 그분은 너 무나도 무기력하게 사 람들 손에 죽고 말았습 니다. 예수님의 죽음 앞 에서 제자들이 느낀 좌 절과 절망, 그리고 두려 움의 깊이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이었을 것입니다. 이 두려움 때문에 제자들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숨어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평화가 너 희와 함께”라는 인사를 건네십니다. 참 의미심장한 인 사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이 얼마나 큰 절망과 두려움에 짓눌리며 힘겨워하고 있는지, 그들에게 지금 절박..

사제의 공간 2024.04.06

하느님은 자비하신 분?…! | 최태현 가브리엘 신부님 (중앙 주교좌성당)

하느님은 자비하신 분?…! 최태현 가브리엘 신부님 (중앙 주교좌성당) 오늘은 하느님의 자비 주일입니다. 하느님의 크 신 자비를 기리는 날인데 요. 먼저, 여러분에게 질 HOLLY DOVE 문 하나를 드리고 싶습니 다. “여러분에게, 하느님 은 자비하신 분이신가 요?” 성경과 교회의 가르침에 기대기보다는, ‘나 에게 하느님은 자비하신 분이신가?’라고 자문자 답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자비에 관한 체험이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연결 지을 수 있는데요. 저는 작년에,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신 은총의 시간을 보내며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했 습니다. 처음에는 어떤 성가 가사처럼, ‘당신을 몰랐더라면 더욱 편했을지 도 모르는 세상’에서 그렇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차라리 하느님을 몰 랐으면 좋았..

사제의 공간 2024.04.05

질문하는 사람, 토마스 | 홍경완 메데리코 신부님(부산가톨릭대학교 총장)

질문하는 사람, 토마스 홍경완 메데리코 신부님(부산가톨릭대학교 총장) 의심하고 질문을 던지는 일은 인간의 것입니다. 인 간만이 질문을 던지며 그 까닭을 알고 싶어 합니다. 그 냥은 받아들이기 싫다는, 수용할 만한 충분한 근거를 찾고 싶다는 인간 의지의 강력한 표현이 질문을 던지 는 행위입니다. 믿음에 대해선 더욱 그렇습니다. 그렇 게 의심하면 불신앙이 더 커질 듯 보이지만, 실은 질문 을 통해 얻어낸 것들이 든든한 토대가 되어 제대로 된 신앙이 뿌리를 내리게 이끌어 줍니다. 신앙은 그 마지막 자리에선 어떤 의심이나 질문도 필 요 없는, 심지어 믿는다는 말조차 무의미한 *지복직관 의 순수가 자리하고 있을 터이지만, 그건 마지막에나 일어날 바라마지않는 일이고, 그리로 향하는 길 위에 서는 늘 ‘믿기 위해서 ..

사제의 공간 2024.04.04

책에 있는 이야기 말고 삶의 이야기 해주세요 | 이상협 그레고리오 신부님(교구 이주사목위원회 위원장)

책에 있는 이야기 말고 삶의 이야기 해주세요 | 이상협 그레고리오 신부님(교구 이주사목위원회 위원장) (클릭);https://www.catholictimes.org/article/20240401500014 [밀알 하나] 책에 있는 이야기 말고 삶의 이야기 해주세요 / 이상협 신부 특강 또는 원고를 부탁받을 때에 이런 말을 자주 듣곤 합니다. 9년여의 아프리카 선교 생활, 그리고 현재 이주민 사목을 하면서 겪은 감동적이거나 보람 있었던 사건들 등. 신자분들은 이처럼 특 www.catholictimes.org

사제의 공간 2024.04.03

아직 깨닫지 못한 이의 달리기 | 최광희 마태오 신부님(문화홍보국장)

아직 깨닫지 못한 이의 달리기 최광희 마태오 신부님(문화홍보국장) 이 글을 읽고 계실 우리 교우분들 중에는, 서로 ‘부활 을 축하한다.’며 나누고 있을 인사가 이질적으로 느껴지 는 분들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평소와 그다지 다르지 않은 평범한 감정들을 스스로 지켜보며, ‘사순 시기를 제 대로 보내야 부활을 기쁘게 맞이한다고들 하던데, 그러지 못한 내 탓인가.’ 하며 씁쓸해하실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부활은 신앙의 완성을 선포하는 순간이 아닙니다. 그 대 신, 달려갈 목표를 분명히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는 희망 을 선사합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의 모습을 통해 그것을 다시금 되새깁니다.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와 요한은 무덤이 비었다는 소식 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빈 무덤을 보고 믿게 되었다는 말 ..

사제의 공간 2024.03.30

빈 무덤 - 부활하신 주님께서 함께 계심을 보는 곳 | 신호철 비오 주교님(총대리 )

빈 무덤 - 부활하신 주님께서 함께 계심을 보는 곳 신호철 비오 주교님(총대리 ) 영이신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표 현하는 말씀을 하실 때 당신 의 온존재를 말씀에 담아서 선물로 주십니다. 그래서 하 느님은 말씀을 낳으시고, 말 씀은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 은 이 말씀을 통해 세상을 창조하 시고 만물을 돌보고 이끌어 오셨습니다. 말씀이 사람 이 되시어 사람의 눈앞에 나타나셨고, 인간의 언어로 써, 하느님은 영이시며 눈에 보이지 않아도 우리를 돌 보고 이끄신다고 알려주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사람이 되어 나타나시자, 사람들은 그분이 눈에 보이지 않는 영이심을 알아듣지 못하였 습니다. 그래서 말씀께서는 당신의 본래 모습, 즉 눈에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계시는 그분을 만날 수 있도록 제..

사제의 공간 2024.03.29

저는 아니겠지요? | 겸손기도 마진우 요셉 신부님(초전성당 주임)

저는 아니겠지요? 겸손기도 마진우 요셉 신부님(초전성당 주임) 행동이 있기 전에 생각이 먼저 있듯이 물리적인 실천이 있기 이전에 영적인 영역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세상이 우리 눈 앞에 뚜렷이 존재하는 것처럼 영적인 것들 또한 분명한 현실입니다. 세상에 '균형'이 있다면 영혼에도 '균형'이 있고 오히려 세상보다 더 참된 질서 안에서 움직입니다. 세상에는 쓰레기라는 존재가 있습니다. 아무 짝에도 소용 없고 버려져야 하는 것들이지요. 그리고 그 쓰레기를 치우는 이가 존재합니다. 쓰레기는 가만히 둔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 수고하여 치워야 합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 일이 일어납니다. 죄는 어둠이고 하느님의 빛을 가리는 것입니다. 죄의 결과로 악이 생겨납니다. 그리고 그 악은 다시 주변에 어둠을 흩뿌립니..

사제의 공간 2024.03.28

비움 다음 단계에 대해 | 이상협 그레고리오 신부님(교구 이주사목위원회 위원장)

비움 다음 단계에 대해 | 이상협 그레고리오 신부님(교구 이주사목위원회 위원장) (클릭):https://www.catholictimes.org/article/20240325500025 [밀알 하나] 비움 다음 단계에 대해 / 이상협 신부 ‘저장성 증후군’에 대해 다룬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습니다. 많은 물건을 구입하고 집 안에 쌓아두는 사람들. 무분별한 소비로 인한 과소유이든, 나에게 주어진 것들을 버리지 못한 채 과소 www.catholictimes.org

사제의 공간 2024.03.27

성주간 | 손병익 루카 신부님(괴산 본당)

성주간 손병익 루카 신부님(괴산 본당) 오늘 주님 수난 성지 주일부터 성토 요일까지 한 주간을 “성주간”이라고 합니다. 성주간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 음을 묵상하는 주간으로 가톨릭교회 의 전례주년 가운데 가장 거룩한 한 주 간입니다. 이 주간에 교회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통하여 이룩하신 하느 님의 구원 신비에 특별한 방식으로 참 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례주년 전 체의 정점을 이루는 성주간 전례는 예수님 생애의 마지 막에 일어난 사건을 기억하고 묵상하는 가운데서 예수 님의 부활을 맞이하도록 해 줍니다. 예수님이 어린 나귀에 올라앉으셔서 예루살렘으로 향하셨습니다. 많은 사람이 자신들의 겉옷을 길에 깔았 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잎이 많은 나뭇가지를 꺾어다가 길에 깔았습니다. 그리고 “호산나! 주님의 이름..

사제의 공간 2024.03.24

지금 나는 어떤 예수님을 만나려 합니까? | 이의철 가밀로 신부님(온양신정동 주임)

지금 나는 어떤 예수님을 만나려 합니까? 이의철 가밀로 신부님(온양신정동 주임) 거룩한 3월 요셉 성 월을 보내며, 오늘 우 리는 주님의 수난 성 지 주일을 만나게 됩 니다. 오늘 모든 교회는 예수님께서 공생활의 완성을 이루시는 예루 살렘 입성 행렬을 재 현합니다. 또한 미사 중 듣게 되는 수난 복음을 통해 십자가에 매달리시어 죽음을 맞이하게 되시는 예수님을 목격하게 됩니다. 이렇게 전혀 다른 감정의 두 가지,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 예수님을 환영하는 기쁨과 사형 선고를 받으시고 십 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을 뵙는 가장 큰 고통을 우리 는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이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예수님은 일반 대중 들이나 심지어 따르던 신앙인들에게도 자신들이 꿈꾸 고 기대하던 메시아, 구원자, 그리스도가 아니..

사제의 공간 2024.03.23

십자가를 진 것은 한 사람이었지만 구원된 것은 세상 전체였다. | 김정현 마태오 신부님(후포 본당 주임)

십자가를 진 것은 한 사람이었지만 구원된 것은 세상 전체였다. 김정현 마태오 신부님(후포 본당 주임) 오늘을 시작으로 우리 교회 안에서 가장 거룩한 시 간들이 진행됩니다. 목요일 저녁엔 예수님과 제자들이 마지막 만찬을 갖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님께서는 성 찬례를 제정하십니다. 그리고 그 밤에 찬미가를 부르며 올리브 산으로 가십니다. 올리브 산 겟세마니 동산에서 십자가의 길을 앞두신 예수님께서는 공포와 번민에 휩싸이시어 제자들에게 함께 깨어 기도하자고 하십니다. 곧이어 배반자 유다를 앞세워 군사들이 들이닥쳤고 예수님께서는 빌라도 앞에 끌려가 심문을 받으십니다. 군중의 아우성에 빌라도는 예수님을 십자가형에 내어놓게 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께서는 금요일 오후 3시경에 숨을 거두십니다. 무덤에 묻히신 ..

사제의 공간 2024.03.22

신앙의 감각 | 이상협 그레고리오 신부님(교구 이주사목위원회 위원장)

신앙의 감각 | 이상협 그레고리오 신부님(교구 이주사목위원회 위원장) (클릭):https://www.catholictimes.org/article/20240318500014 [밀알 하나] 신앙의 감각 / 이상협 신부 전통적으로 가톨릭 교회는 신자들에게 신앙을 심어주기 위해 주로 ‘보이는 것’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지금도 수많은 종교예술 작품들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작품들 www.catholictimes.org

사제의 공간 2024.03.21

마음 안에 주님의 십자가를 세웁시다. | 한건도미니코 신부님(이기대성당 주임)

마음 안에 주님의 십자가를 세웁시다. 한건도미니코 신부님(이기대성당 주임) 주님 수난 성지 주일인 오늘 예수님께서 파스카 신 비를 완성하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그 때 당신을 향한 군중들이 나뭇가지를 흔들면서 “호산 나”를 외치며 환영합니다. 군중들은 자신들의 꿈인 다 윗의 나라를 예수님에게서 본 것입니다. 반면에 유대 의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위험한 인물로 냉랭하 게 쳐다봅니다. 잠시 후 열렬히 환호하던 군중들도 점 차 태도를 바꿉니다. 유대 지도자들과 한패가 되어 예 수님을 반대하는 살인 동조자로 돌변합니다. 힘없이 체포된 예수님을 보자, 자신들의 꿈이 깨졌다고 죽이 려고 크게 외칩니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제자들도 수난당하시는 예수님을 버립니다. 베드로 는 세 번이나 예수님을 ..

사제의 공간 2024.03.20

두 목숨 | 겸손기도 마진우 요셉 신부님(초전성당 주임)

두 목숨 겸손기도 마진우 요셉 신부님(초전성당 주임)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요한12,25) 우리가 영원을 살지 못하는 이상 영원한 생명이 있는지 없는지를 증명할 도리는 없습니다. 영원히 살아야 그것이 증명이 되겠지요. 그래서 우리는 이 양자의 여정 속에서 하나를 선택하고 살아갈 뿐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거부하는 이들에게 남는 선택지는 현세의 삶 뿐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현세의 삶을 최대한 충만하게 살아야 합니다. 물론 그 충만의 뜻은 저마다 정하게 됩니다. 어차피 영원을 설정한 분이 없고 저마다 자신의 주인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누군가에게는 충만한 삶, 행복한 삶이 돈을 잔뜩 벌고 잔뜩..

사제의 공간 2024.03.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