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대간 소통

누룩 | 무덤을 허물고 일어나

松竹/김철이 2024. 3. 30. 12:25

무덤을 허물고 일어나

 

 

세례받은 지 50년이 다 돼가니 그만큼의 부활을 보 냈을 겁니다. 어릴 땐 달걀주는 부활절이 명절 같아 좋 았습니다. 한때는 부활 사건을 의심한 적도 있었습니 다. 흰머리가 생길 때쯤에서야 십자가의 희생과 예수 님 부활을 통해 우리도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부활의 신비를 조금씩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부활의 기쁨을 간직한 주님의 백성으로 살기보다 세상일에 바쁜척하 며 예수님 주변을 서성이는 ‘부활구경꾼’으로 살아온 시간이 훨씬 많았음을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올해 사순절을 맞이하며 신약성경 필사를 시작했습 니다. 예수님을 조금이라도 내 몸 가까이 느껴보고 싶 었습니다. 눈으로만 읽을 때보다 말씀이 내게 머무는 시간이 늘어난 것 같아 좋았습니다. 무엇보다 쓴 날과 안 쓴 날의 차이가 확실했습니다. 성경을 쓴 날은 부딪 히는 일들에 너그러워지고 만나는 사람들에 친절해진 나를 체험했습니다. 성경을 쓰면서 느끼는 차분한 행 복이 혹시 성령이 머무시는 시간은 아닐까하는 생각 도 들었습니다. 그리고 조금 더 분발하면 그동안 들어 서만 알던 부활의 의미를 나의 일상 속에서도 느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욕심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부활 하신 예수님은 어디에 계실까요?

 

“어찌하여 살아계신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서 찾고 있느냐?”(루카 24,5) 돌아가신 예수님을 찾는 여인들에 게 천사가 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대로라면 예수님은 살아있는 이들 가운데 계실 것 같습니다. 성체를 모실 때마다 나에게도 오십니다. 그런데도 왜 난 아직 부활 한 예수님을 찾고 있을까요? 어쩌면 죄짓고 세상 욕심 부리느라 내게 오신 예수님을 뒤로 밀어내고 이기심, 불신, 무지 등의 돌과 흙으로 마음의 무덤을 쌓아 예수 님을 가두어 둔 것은 아닌지 두렵고 부끄러운 마음입 니다.

 

부활은 내가 쟁취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주신 선 물입니다. 다만 무덤을 벗어나야 받을 수 있습니다. 부 활의 그리스어 어원은 ‘일으킴’이라고 합니다. 예수님 의 손을 잡고 무덤에서 일어나 예수님과 소통하며 이 전과는 다른 삶을 사는 것, 그것이 부활 아닐까요? 거 룩한 변모까지는 아니더라도 하느님 나라를 향해 조 금씩 일상을 변화해 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이라던 신 부님 강론이 기억납니다. 그러고 보니 주변에는 이미 부활의 기쁨을 나누기 위해 수고를 마다하지 않은 분 들이 많습니다. 성가대, 복사단, 전례부... 이런 분들의 노력으로 나는 참 편하게 부활 선물을 받아왔다는 생 각이 듭니다. 앞으로 성당 청소에라도 참여해 봐야겠 습니다. 아마 그곳에서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