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룩 96

누룩 | 나를 찾아오신 때

나를 찾아오신 때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며 우셨다. 그 때 예루살렘을 향하여 단호하게 말씀하신다. “네 안에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있지 않게 만들어 버릴 것 이다.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 였기 때문이다.”(루카 19,44)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라는 말씀을 읽으며 나는 두려 움을 느꼈다. 주님께서는 분명 나에게도 가끔, 혹은 자 주 찾아오셨을 것이다. 그분께서 나를 찾아오셨는데 내가 알지 못했던 때는 언제였을까. 이른 새벽, 맑은 정신으로 눈을 뜨게 되면 그것은 주 님께서 나를 부르시는 것이라고 했다. 묵상하기 좋고 기도하기 좋은 고요한 시간, 이불 속에 누워서 쓸데없 는 잡념으로 시간을 헛되이 보내고 말았다면 주님께 서 나를 찾아오..

세대간 소통 2024.04.27

누룩 | “평화가 너희와 함께!”

“평화가 너희와 함께!” ‘지란지교’라 하면, 늘 유안진 시인의 시가 생각납니 다. “…이야기를 주고받고 나서도/ 말이 날까 걱정되 지 않는 친구…”가 곧, 지란지교를 나누는 벗이지요. 가족이나 친지일지라도, 마음속 생각을 드러내어 이 야기를 나누기가 쉽지 않은 세상입니다. ‘말이 날까’ 두 려워서입니다. 상대방을 믿고 나눈, 속 깊은 대화가 돌 고 돌아 다른 사람에게서 듣게 되는 경험이 누구나 한 번쯤은 있을 것 같습니다. 남의 말하기 좋아하는 게 세 상 사는 모습인가 봅니다. 수년 전 이야기입니다. 사월 중순 즈음에 한 학생이 면담을 신청해 왔습니다. ‘말이 날까’ 두려워 가족에게 조차 말할 용기를 내지 못하던 차에 저를 찾아온 것입 니다. 믿고 상담하러 와 준 것만 해도 고마웠습니다. 여러 날 학생..

세대간 소통 2024.04.13

누룩 | 나의 행복 리스트

나의 행복 리스트 청·청·해(청소년·청년의 해)의 목표가 쉬워서 한 번 에 외워졌다. “하느님 안에서 청소년과 청년이 행복을 느끼는 것” 8년 동안 성당을 다니며 행복을 느꼈던 기 억과 본당 공동체에서 받은 사랑을 알리고 싶다는 생 각에 쓰게 되었다. 1. 스물한 살, 비신자였던 내 고민을 진심으로 경청 해주고 함께 고민해 준 신부님. 2. 그냥 이유 없이 반갑다며 10m 전부터 손 흔들고, 손잡아 준 수녀님. 3. 언젠가 내가 세례를 받을 때 대모를 서주겠다며 웃었던 오빠, 그리고 내가 하는 일이라면 전부 응 원하고 믿어주는 항상 내 편인 대모님. 4. 궁금한 것이 많았던 나의 질문을 다 받아주고, 오 르간도 가르쳐 준 오빠. 5. 몸이 아파 힘들어할 때 따스하게 안수해 준 신부 님과 기도해준 청년들...

세대간 소통 2024.04.06

누룩 | 무덤을 허물고 일어나

무덤을 허물고 일어나 세례받은 지 50년이 다 돼가니 그만큼의 부활을 보 냈을 겁니다. 어릴 땐 달걀주는 부활절이 명절 같아 좋 았습니다. 한때는 부활 사건을 의심한 적도 있었습니 다. 흰머리가 생길 때쯤에서야 십자가의 희생과 예수 님 부활을 통해 우리도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부활의 신비를 조금씩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부활의 기쁨을 간직한 주님의 백성으로 살기보다 세상일에 바쁜척하 며 예수님 주변을 서성이는 ‘부활구경꾼’으로 살아온 시간이 훨씬 많았음을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올해 사순절을 맞이하며 신약성경 필사를 시작했습 니다. 예수님을 조금이라도 내 몸 가까이 느껴보고 싶 었습니다. 눈으로만 읽을 때보다 말씀이 내게 머무는 시간이 늘어난 것 같아 좋았습니다. 무엇보다 쓴 날과 안 쓴 날의 차이가 ..

세대간 소통 2024.03.30

누룩 | 뿌리 찾기와 순교자

뿌리 찾기와 순교자 족보는 시조부터 편찬 당대까지의 계보를 기록한 가 계기록(家系記錄)을 통칭한다. 특히 조선시대 족보는 양반 계급의 우월한 사회적 지위를 잘 드러내고 공고 하게 만드는 문화적 상징물이다. 당대 양반들이 족보 출간에 소비한 종이는 인구 1인당 세계 최고인데, 바 로 족보가 갖는 이러한 함의(含意) 때문이다. 이처럼 양반들이 족보를 편찬 간행하는 일은 자신들의 정체 성을 확립해 나가는 주요한 방법 가운데 하나였다. 성씨와 계보에 대한 지식은 보학(譜學)이라 불렸다. 이는 당대 양반이 그들의 지위에 걸맞게 처신하기 위 해서는 반드시 갖추어야 하는 상식이었다. 오늘날 성 씨와 본관에 관한 지식이 전통문화의 중요한 일부로 인식되는 것 또한 이와 같은 맥락이다. 그러므로 현재 일반인들에게도 자신들..

세대간 소통 2024.03.16

누룩 | 참 삶의 길

참 삶의 길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이 지혜를 가르쳐 주지만, 힘겹지만 진정한 체험을 지속하다보면 영적인 성장이 일어나서 어떠한 상황이 펼쳐지더라도 꿋꿋이 나아갈 수 있다.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한 사람의 스토리가 있다. 그는 조직 폭력배와 마약쟁이라는 어둠의 삶을 박차고 일어 나 진정한 빛을 발견했다. 풀 한 포기 없는 척박한 땅이 었지만 하늘에서 비가 내리고 난 후 생명의 꽃이 피어 나는 느낌을 그에게서 받는다. 하요한과의 인연은 20년 전 그의 아들의 정신과 진 료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에는 잘 몰랐으나 시간 이 지나면서 파란만장한 그의 삶을 알게 되었다. 그는 13살 때 가출하여 소매치기로 소년원을 전전했고, 성 인이 되자 시외버스터미널을 관리하는 깡패조직에 들 어가 각목과 쇠 파이프를 휘두..

세대간 소통 2024.03.09

누룩 | 나에게 새로운 삶을 주신 분

나에게 새로운 삶을 주신 분 고등학교 3학년 때 주님의 부르심으로 성당에 오게 된 저는 매주 꿀 같은 주말 아침잠을 주님께 봉헌하여 기쁘디기쁜 부활절 밤에 세례를 받았습니다. 수험생활 중 매주 성당에 나갈 수는 없었지만, 틈틈이 아침·저녁 기도와 묵주기도를 바치며 주님과 대화하고 그분 안에 서 저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끝없는 터널 같았던 수험생활을 마치며 신앙생활에 활력을 불어넣고 싶었던 저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품고 청년회에 들어갔습니다. 또래의 청년들과 서로의 신앙 을 나누고 다양한 행사를 통해 예수님을 알아가는 삶 은 말라붙었던 제 마음을 다시 따스하게 적셔주었습니 다. 하지만 스무 살이 된 청년에게 속세의 유혹은 성당 의 즐거움보다 더 크게 다가왔습니다. 게다가 힘든 일 들도..

세대간 소통 2024.03.02

누룩 | 일상 속 작은 실천

일상 속 작은 실천 올해 일곱 살이 된 제 아이가 아주 어릴 적, 모기에 물려 심하게 붓거나 피부 트러블로 힘들어할 때 도움 이 되는 게 뭘까 생각하다가 천연화장품과 비누 만들 기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로 다양한 자격증을 취득하며 계속하고 있는 ‘천연화장품과 비누 만들기’ 는 자기개발은 물론 마음의 힐링까지 책임지고 있습 니다. 처음에는 만들어 쓰는 것이 재미있고 피부에 좀 더 좋겠지라는 단순한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점점 더워지는 날씨, 이상기온과 홍수와 태풍 등 지구는 지 속적으로 힘듦을 표현했고 기후 위기에 대한 고민이 더해졌습니다. 내 아이는 물론 우리가 함께 살아 나갈 지구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고 공부하는 시간이 이어지던 중, 제로웨이스트를 통해 실천으로 이어질 수 있었습니..

세대간 소통 2024.02.24

누룩 | 신비롭게 연결되어 있는 인간의 몸처럼

신비롭게 연결되어 있는 인간의 몸처럼 어린 시절 오빠를 따라 공놀이, 달리기 등 활동적인 운동을 좋아했던 저는 발목을 자주 접질렸습니다. 어 머니께서는 다친 저를 한의원에 데리고 가 침을 맞게 하셨습니다. 어린 저는 발목이 아픈데 팔과 머리에 침 을 놓는 것이 흥미로웠습니다. 사람의 몸은 다 연결되 어 있다는 한의사의 말도 신기한 동화처럼 들렸습니다. 이후 성인이 되어 부산선택주말 봉사자로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또래들의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 웃고 우는 청년들을 바라보며 이 또한 대단하다는 느 낌이 들었습니다. 생면부지인 사람들이지만 자신의 이야기를 허심탄회하게 나누고, 그 이야기에 진심으 로 공감하고 경청하는 모습이 놀라웠습니다. 마치 하 느님께서 사람의 몸을 신비롭게 연결해 놓은 것처럼 당신 ..

세대간 소통 2024.02.10

누룩 | “없는 이에게 베푸는 일을 미루지 마라.”(집회 4,3)

“없는 이에게 베푸는 일을 미루지 마라.”(집회 4,3) 그날은 참 추웠다. 안전 안내 문자는 한파 주의보 예 보로 강추위가 예상되니 외출을 자제하라고 하였다. 특별히 노약자들께서 꼭 외출을 해야 할 때는 모자, 장 갑, 목도리 등 방한용품을 착용하라고 하였다. 난 추위에 약해서 사계절 중 겨울나기가 제일 힘들다. 언제인가 몹시 추운 날 새벽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 고 나왔다가 미사 참례 중에 쓰러진 일도 있어 그 이후 로 매서운 추위가 몰려오는 날에는 완전 무장을 한다. 모자는 물론이고 머리에서 발끝까지 겹겹이 싸매고 집 밖을 나선다. 얼마 전 그날 예보대로 북극 한파 주의보가 내렸다. 나는 나가고 싶지 않았지만 볼일이 있어 어쩔 수 없이 나가야만 했다. 길을 건너기 위해 횡단보도 앞에 섰다. 녹색등을..

세대간 소통 2024.01.27

누룩 | 연중의 삶 속에서

연중의 삶 속에서 다시금 연중 시기가 시작되었다. 성탄 대축일과 연 말연시 연휴의 들뜬 분위기들이 차분해지는 가운데 평범한 일상의 리듬으로 돌아와 다시 출근을 한다. 나 는 나의 출근길을 하이브리드 출근길이라 부른다. 자 동차가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가는 경로가 시골 풍경 과 도시 풍경이 섞여있어서이다. 급할 때야 지름길로 잘 닦인 도로를 타기도 하지만, 여유가 있을 때면 샛길 들을 조금 둘러가면서 철철이 변하는 진짜 자연을 느 끼며, 그 자연을 터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볼 수 있 어서 좋다. 그날 아침도 여느 때처럼 한갓진 길을 따라가던 중, 저만치 떨어진 어떤 인가에서 누군가가 걸어 나오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한 노인이 대야를 들고 앞마당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마른 몸집에 오히려 대야가 무거 워..

세대간 소통 2024.01.20

누룩 | 일상 가운데 함께 계시는 하느님

일상 가운데 함께 계시는 하느님 아침에 일어나 창밖을 바라봅니다. 여명이 밝아옵니 다. 떠오르는 아침 햇살이 온 세상을 포근히 감싸 안습 니다. 세상을 만드신 하느님의 손길이 이처럼 따스했 을까요. 출근길 가파른 언덕을 오릅니다. 골고타 언덕 을 오르신 예수님을 떠올려 봅니다. 십자가를 지고 골 고타 언덕을 오르신 그 숨결이 이처럼 가빴을까요? 한 참 일을 하다 문득 창 밖을 바라봅니다. 부서지는 햇살 가운데 조금 쌀쌀해진 겨울바람이 바스락 노래 부르 는 것이 마치 천사들의 웃음소리 같습니다. 점심을 먹 으러 나서는 길, 건조해서 거칠어지고 앙상해진 나무 를 바라봅니다. 예수님을 짓눌렀던 가시관이 이처럼 거칠고 뾰족하였을까요? 퇴근길 어느새 어두운 밤하늘 사이로 가로등의 불빛 이 세상을 밝힙니다. 너희는..

세대간 소통 2024.01.06

누룩 | 세상을 건강하게 하는 백신, 성가정

세상을 건강하게 하는 백신, 성가정 올해는 저희 가정 첫 아이의 첫영 성체가 있었던 은혜로운 한 해였습니 다. 3월부터 시작된 첫영성체 교육은 10월 중순까지 이어졌습니다. 대상 자 아이들뿐만 아니라 부모들에게도 신앙 재교육의 시간이었습니다. 코로 나19로 인해 냉담했던 어느 부모님 도 자녀의 첫영성체를 계기로 다시 교회 품에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아이가 첫영성체하던 순간은 감격 그 자체였습니다. 주님과 일치하는 은총을 우리 아이도 누릴 수 있게 됐기 때문입니다. 가정의 중심에서 늘 함께하시며 저희 자녀들에게도 당신과 일치할 수 있는 은총을 허락 하신 성령께 거듭 감사를 드렸습니 다. 참으로 성가정은 축복입니다. 우리 가족에게 첫영성체 교육 과 정은 사실 순탄하지만은 않았습니 다. 직업 성격상 주말 주..

세대간 소통 2023.12.30

누룩 |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마태 25,13)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마태 25,13) 오늘은 연중 제32주일이자 제56 차 평신도 주일입니다. 평신도는 하 느님 백성 가운데 성직자를 제외한 모든 신자를 가리킵니다. 제2차 바 티칸 공의회는 평신도의 역할을 크 게 부각하면서, 평신도를 통하여 교 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수 있 다고 강조하였습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 말씀처럼 하느 님의 잔칫상에 앉는 합당한 준비로 등잔에 기름을 채워야 합니다. 기다 림에 지치지 않고, 주님께서 오실 때에 서둘러 마중하여 혼인 잔치에 함께 들어갈 수 있어야 합니다. 어 리석은 처녀들처럼 등잔은 가지고 있되 기름이 없다면, 믿음은 있되 신앙이 없는 형식뿐인 신앙인일 것 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늘 “예, 여 기 있습니다.”라고 ..

세대간 소통 2023.11.11

누룩 | 아버지의 이름으로

아버지의 이름으로 큰딸이 고3 때쯤이었습니다. 천 사 같던 딸들이 작심한 듯 냉담을 선언하던 날을 잊지 못합니다. 부 모의 신앙에 반기를 드는 것이냐며 큰소리를 냈습니다. 하지만 시간 을 쪼개고 잠을 줄여 입시에, 이후 에는 취업에 매달리는 딸들을 보 며 마냥 반대만 할 수는 없었습니 다. 그렇게 몇 번의 갈등 끝에 딸들 의 냉담을 묵인했습니다. 대신 언 젠가 주님 품에 다시 돌아올 거라 는 딸들의 말을 믿고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얼마 전 아시안게임 배드민턴 여 자 결승전, 부상으로 쓰러진 딸을 보며 관중석의 어머니는 오열하며 “기권해도 돼”라고 외쳤습니다. 하 지만 딸 안세영 선수는 힘줄이 끊 어진 무릎에 테이프를 감고 기적처 럼 승리를 일궈냈습니다. 고통을 감내하며 자신의 길을 가는 딸을 보는 그 어..

세대간 소통 2023.10.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