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겨울의 시간
조용히 강의실에 들어오는 그를 보았다. 전동휠체어 를 미끄러지듯 밀고 들어와 맨 앞줄에 착석했다. 팔십 이 넘은 연세에도 눈빛만은 빛났으나 고개를 들지 않 았다. 매번 원고를 제출했으나 원고 분량이 길고 도대 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섬광처럼 떠오르는 생각의 파편들이 백지에 툭툭 떨어져 도로 위에 나뒹 구는 낙엽처럼 부스러지고 있었다. 그 원고들을 첨삭 할 때면 시간이 많이 걸렸다. 그러니 다른 수강생들은 첨삭시간을 갉아먹는 노인에게 보내는 시선이 따가웠 고, 노인의 눈은 나를 아프게 했다.
노인은 태어나면서 다리를 못 썼다. 초등학교도 가 기 전에 그는 구두닦이가 되었다. 구두가 어설프게 닦 이면 어른들 중에는 화를 내거나 구두통을 걷어차기 도 했고 얼굴에 침을 뱉기도 했다. 초등학교에 가는 동 네 아이들이 부러워 밤이면 방 벽에 붙은 신문으로 글 자를 터득했고, 교과서를 구하여 밤에 공부했다. 중고 등학교 공부도 그렇게 했다. 그러던 중 이웃에 사는 신 사 한 분이 그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다. 저녁을 먹이 고는 아들 과외교사를 제의했다. 그는 놀랐지만, 그의 영특함을 알아본 노신사는 그를 설득해 당시 초등학 교 저학년이던 자신의 아들을 가르치게 했다. 그 신사 는 당시 법조인이었다.
그 덕분에 다리가 불편했지만 살림에 보탬을 줄 수 있었고, 자존감을 살려 주었고, 신사의 아들을 가르치 기 위해 스스로도 공부를 열심히 했다. 후에 그 아들은 의과대학에 들어갔다.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결혼하여 유학을 떠나기 며칠 전 아들은 새색시를 데리고 찾아 와 큰절을 올렸다. 아버지께서 시키신 일이었다.
노인의 원고를 읽으며 카오스 같은 세상에도 이런 법조인이 계시는구나 하는 생각에 한겨울의 차가운 바람이 맑고 따뜻했다. 내로라하는 대학의 학생 중에 서 뛰어난 과외교사를 구할 수 있었을 텐데 가장 낮은 자리에 불편한 몸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귀한 아들의 과외교사로 들였던 것이다. 그분의 아들은 학창시절 한 번도 사춘기적 반항을 한 적이 없다고 했다. 법조인 은 어차피 공부는 자신이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므 로 아들에게 인생을 가르치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 이 들었다.
몇 학기째 수강하고 있는 노인을 이제는 그 누구도 삐죽거리고 비난의 눈길을 보내지 않는다. 어릴 적 나 비가 유일한 친구라고 했던 노인의 글에 왈칵 눈물을 쏟으면서도 담담함 속에 정다움을 묻으며 ‘깊음’이란 단어를 이해했다.
성탄을 지내고, 주님 공현 대축일과 주님 세례 축일 을 차례로 보내며 겨울의 시간이 흐르고 있다. 차가운 지푸라기 위에 놓이신 아기 예수님께 미사 때마다 경 배를 드린다. 한겨울 춥고 차가움을 물리치며 따스하 게 다가오는 예수님의 사랑. 내 가슴 속 마당을 천천히 거닐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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