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제의 공간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松竹/김철이 2020. 4. 21. 09:43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정호 빈첸시오 신부님(부산교구 괴정성당 주임)




니코데모와의 대화는 이어집니다. 주님의 기적에 놀라 주님을 찾아온 니코데모에게 예수님은 위로부터 새로 태어나야 한다는 말씀을 하시며 영에서 태어난 이가 그의 생각과 같지 않음을 이야기하십니다. 그는 자신의 기준을 넘어서는 분에게서 하느님을 찾았지만 예수님은 당신의 삶이 그가 생각하는 높은 차원의 삶으로 여기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십니다. 



여전히 다시 태어난다는 것에 집착하며 그 의미를 고민하는 니코데모에게 예수님은 그가 보고 있는 예수님의 단편적인 것이 아닌 그분의 모든 것을 통해 하느님의 뜻을 알아들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곧 예수님의 놀라운 기적이 아닌 그분이 누구와 사시고 어떻게 사시는지를 통해 하느님은 이미 모든 것을 말씀하시고 보여주심에도 그들이 눈이 가려져 있다는 것입니다. 일상 생활 속에 하느님은 숨은 듯, 혹은 계시지 않는 듯 하고 특별한 일에만 놀라고 반응하는 니코데모와 같은 이들이 모든 곳에 계시는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스승이라는 이 조차 하느님을 바로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어렵고 가려져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으로부터 모든 것을 시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삶의 도처에 존재하는 하느님의 뜻을 보려하지도 않았습니다. 






"내가 세상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않는데,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찌 믿겠느냐?"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은 특별한 표징이 아니라 그분의 모든 삶에 포함되어 있었던 하느님의 뜻이었습니다. 특별한 시간에, 특별한 사람에게, 특별하게 드러나는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 안에 말씀하시는 하느님과 모든 이 안에서 사시는 하느님을 보여주신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러나 특별함에 갇혀 사는 이에게 주님은 인정하지 싫은 그리고 인정할 수 없는 평범함이 가려지고 맙니다. 



결국 그들은 예수님을 사람들 사이에서 떨어뜨려 그분을 아무런 존재가 되지 못하게 만들어 버리려 했습니다. 주님을 스승님이라고 부르지만 결국 니코데모와 같았던 이들이 내린 결론을 니코데모도 막지 못했습니다. 그분이 특별할 때 하느님의 사람이었으나 그분이 평범함을 뒤흔드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나약함을 죽음을 통해 사람들에게 보여주려 했습니다. 그분이 사랑하는 이들에게 그분을 십자가에 못박으라 외치게 하면서 서로에게 하느님은 우리의 삶 속에 계시지 않는다는 것을 가르치려 했습니다. 



그들의 계획대로 예수님은 십자가에 오르셨고 모든 이가 그분을 본보기로 보았습니다. 그분처럼 사랑하며 사는 것은 결코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는 본보기로 말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계획은 하느님으로부터 뒤집혔습니다. 그들이 말한 모든 것이 부활이라는 사건으로 영원한 생명과 구원의 징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십자가에 달린 분처럼 사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는 것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그분의 놀라운 일들을 모두 지워버렸지만 그분의 부활은 예수님의 모든 것을 다시 살려 내었고 우리는 그분을 본받고 따르기만 하면 된다는 쉬운 결론을 얻었습니다. 십자가는 주님의 고통이 아니라 주님을 보여주는 징표이고 그 십자가의 예수님은 우리를 행복하게 하신 우리 안의 하느님이셨습니다. 




위로부터 새로 태어난다는 것은 고차원적인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 일상 속에 하느님을 알고 사랑하며 현재를 충실히 살아가는 선한 이의 삶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세례가 의미하는 것이고 우리의 고해가 열어주는 삶의 자리이며 성체로 우리와 늘 함께 하시는 하느님의 진리입니다. 주님처럼 살아가는 것은 십자가를 향해 걷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가 와도 주저없이 받아들일만큼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보고 생명을 얻는 사람의 아들을 보는 방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