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제의 공간

"이미 늙은 사람이 어떻게 또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松竹/김철이 2020. 4. 20. 09:36

"이미 늙은 사람이 어떻게 또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정호 빈첸시오 신부님(부산교구 괴정성당 주임)



부활의 기쁜 한 주간이 지나고 일상으로 들어와 부활의 여운을 간직하며 살아가게 되는 부활시기입니다. 부활시기에 우리가 만나는 예수님의 모습은 부활 이전의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같은 시간 벌어진 일이지만 그 일을 언제 보는가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지는 것은 부활만큼 극적인 계기가 없을 듯 합니다. 실제 벌어질 때 그 일들은 그저 새로운 생각이나 가능성이었지만 부활이 그 모든 것을 진리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니코데모. 그는 바리사이였고 최고 의회의 의원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구원받은 백성임을 자랑스러워하고 율법을 지키는 바리사이 중 스승이었던 그가 주님께 "스승님"이라고 부른 이 일은 주님이 하시는 일들을 보며 글로 배웠고 말로만 들었던 하느님을 직접 본 듯 느꼈다는 것을 고백한 사건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의 놀란 마음에 부족함이 크다는 것을 지적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그가 주님을 찾아오고 고백한 것은 주님의 놀라운 '표징' 때문이지만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함께 계신 의미는 그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신앙의 시작일 수는 있지만 예수님은 당신을 깨닫는 것은 바로 그를 이스라엘의 스승으로 만들어 준 율법의 정신, 곧 하느님의 뜻을 알아야 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곧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제대로 알고 있지 못했고, 오히려 그가 할 수 없는 것을 지닌 것으로 예수님을 인정하려 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안다고 말하는 이가 겸손한 듯 보이는 이 태도에 가장 중심과 근본이 비뚤어져 있다는 것을 지적하신 셈입니다. 


하느님을 모르는 이에게 하느님을 아는 것은 전혀 몰랐던 것으로 새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니코데모와 같이 이미 하느님을 안다고 생각되는 이에게 '위로부터 태어나는 것'은 이보다 몹시 어려운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평생 하느님을 믿었으나 느끼지 못하겠다는 고백과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그를 다시 가슴 뛰게 하는 것을 '체험'이라는 말로 표현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하지만 그 체험이 그에게 전혀 없던 하느님을 가져다 주는 것은 아닌데도 그처럼 생각하면 그에게 하느님은 그런 분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 밤 니코데모에게 예수님은 하느님의 놀라운 기적을 가진 분으로만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그가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통해 하느님을 다시 알아들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중입니다. 



오늘은 장애인의 날입니다. 하루 쯤 불편함을 겪는 이를 생각하는 날로 여겨질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장애인의 날을 지내는 장애인에게 이 날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장애를 생각하고 지켜보는 이들을 위한 날일까요? 아니면 장애라는 평생의 불편함으로 세상을 사는 이들의 삶과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날일까요? 누구도 이 날의 의미를 함부로 정의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이 날 장애라는 부족함의 단어를 삶에서 떼어 놓지 못하는 이들이 삶을 어떻게 사는지 우리가 아는 것에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는 있습니다. 


장애인의 하루가 다른 사람들의 하루와 다를리 없고 시간도 똑같이 흘러간다는 것은 그들이 이 삶을 가능한 모든 것으로 최선을 다해 산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장애를 기준으로 사람을 보지만 장애인은 사람이라는 동일한 기준으로 세상을 살려고 애를 쓴다는 것입니다. 그조차 달라져 버린 가치와 조건이 있지만 최선이란 말이 최고라는 말과 구분되지 않는 것이 장애인에게 놓여진 주제입니다. 


우리는 선택할 수 있는 게으름이 생사의 문제가 되는 이들이고 우리가 느끼는 대리 체험이라는 것이 그들의 삶을 도와주는 보조기를 이용하는 것이 전부라면 우리는 사람의 인생과 귀함에 니코데모와 같은 기준을 가지고 있는 셈입니다. 



많은 불편함을 가진 우리의 삶입니다. 언제까지 계속될지 귀 기울이고 함께 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이것이 평생의 삶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하는 조건문보다 이미 그 삶을 살아가는 이들을 위해 오늘 하루쯤은 새로 태어나는 우리의 삶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