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제의 공간

세례자 요한에 대한 유감

松竹/김철이 2019. 12. 12. 10:03

세례자 요한에 대한 유감



                                                        정호 신부님(부산교구 괴정성당 주임)



어릴 때 성당에 다니며 받은 교육은 많이 엄했습니다. 한 번도 그것을 불편하게 느낀 적이 없었고 그것이 옳다고 생각했었기에 스스로 그 규칙 속에서 성장한 느낌마저 받지만 성직자의 길이 아니라하더라도 그 생활은 누구에게나 강조되던 거룩함이었습니다.


그러다 신학교에 들어가고 여러가지를 경험하며 깨달은 것 중 하나는 지금까지 받은 교육과 영향이 그리스도와 참 많이 다르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이야기하고 요구하는 거룩한 사람의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길이 아닌 세례자 요한의 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사람이란 처음부터 정해진 듯 한 사람이어야 하고, 그는 무죄한 사람이라 보통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떡잎부터 다른 이어야 하고 그 삶도 늘 바르고 정직한 의로움 가득한 무죄한 이의 길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기도가 일상이고 혼자 있는 시간에도 하느님과 함께 하는 의식으로 깨어 있는 칼날 위의 삶처럼 주님을 찾는 이가 되라는 보이지 않는 요구가 있었던 듯 느껴집니다. 물론 아무도 그렇게 말하지 않지만 또 누구도 그것 외의 파격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에게 이런 모습을 찾기란 쉽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모든 모습에 완전히 딱맞아 떨어지는 이는 세례자 요한입니다. 그는 처음부터 거룩한 사람이었고 끝까지 흔들리지 않는 정의로움의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의 모습을 달리 표현하면 '비인간적'이라고 말할 만큼 그는 도무지 틈이 없었습니다. 광야에서 살던 그의 모습과 그가 사람들에게 천둥처럼 호통치는 모습에는 '자기 반성'의 여지는 없습니다. 그는 정말 무죄했고 도덕적으로 완벽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의 이 완벽함은 그가 있었던 광야 덕분이었습니다. 그는 사람과 어울리지 않았고 완벽하게 하느님 안에서만 살았기에 그에게 대적할 만한 사람은 없습니다. 사생활이라할 것도 없는 그의 삶이야말로 공생활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는 모습이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말입니다.


하지만 그는 보지 않은 것을 말해야 했고 알지 못하는 구세주를 예언해야 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보고 메시아라 했고 그는 어느날 죄인들 속에 누군가를 구세주로 고백해야 했습니다.


사제로 살면서 도대체 내가 누구를 따라 사는 것인지 헛갈릴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엉망이 되어버린 시간들. 예수님처럼 산다는 것이 나쁜 것도 아니고 잘못된 것도 아닌데 그러면 안될 것 같은 느낌에 발목이 잡힌 적도 있었습니다. 이게 다 요한 때문입니다.


사람이 생각할 수 있는 극단의 우등생. 요한에게 유감입니다. 그가 망쳐버린 삶에 한숨이 나오는 하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