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녀석 한마리 때문에..."
정호 신부님(부산교구 괴정성당 주임)
모두가 한 우리 안에 있을 때 목자는 몇가지 신호만으로도 양들을 수월하게 이끌 수 있습니다. 문을 열어주면 나가고 종을 치거나 개를 풀거나 고함을 질러 그들을 한 곳에 이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중 하나라도 무리에서 이탈한다면... 심부름을 하는 목동이라면 돌아올 꾸중과 한 마리의 값을 물어야 한다는 부담감에 애가 쓰이겠지만 복음 속 목자는 이 한마리를 위해 별 고민 없이 길을 나섭니다.
물론 이 이야기는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만 등장합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두고 소란해집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미 내려졌고 한 마리를 구해와야 한다는 것은 기정 사실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에서 99마리와 1마리를 놓고 선택의 문제를 경험하는 것은 일반적인 일입니다.
그 한마리가 나머지 양들보다 스스로 가치있다면 선택은 쉬워집니다. 그 한마리가 수십만의 다른 양들보다 사목에 필요하고 또 찾는 것이 나중을 생각해도 큰 도움이 된다면 우리는 주저 없이 그를 찾고 또 찾을 것입니다.
문제는 그 양 하나가 골치아픈 엉뚱한 양이라면 문제는 달라집니다. 평소에도 좀 '없었으면'한다던가 스스로를 '이상하다'고 떠벌리던 규제할 수 없었던 돌연변이 같은 존재라면 그 양은 스스로 다른 길로 가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이가 보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다행이다'라고 마음으로부터 불편한 안심을 가질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예수님의 이야기는 분명 그 양 한마리가 다른 이들과 달리 가치가 있다는 말씀은 아닐겁니다. 예수님의 생활 속에도 먼저 버려지고 잊혀졌다면 불행한 십자가 사건이 시작되지 않았을지도 모를 인물이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에게도 당신 생명의 빵과 포도주를 건네셨습니다.
우리가 나서야 할 한마리는 교회에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이 선택에 주님의 판단을 따라야 하는 것은 주님은 선택에는 그들 모두를 사랑하는 마음 하나 외에 다른 기준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 마지막 순간에도 주님은 백성들 모두를 사랑하셨고 당신을 스스로 떠나려 결정한 그에게도 연민을 보이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양이 스스로를 판단하고 결정을 하는 것은 어리석음에 가깝습니다. 그것을 유도하고 요구하는 것 조차 같습니다. 주님이 맡기신 양들의 고민과 이탈을 그들 탓으로 돌리는 것이 더 나쁜 일인 이유입니다.
가진 것을 지키려 애를 쓰고, 떠난 것에 미련을 두지 않는 우리가 된지 꽤 오랜 일입니다. 그래서 이제 남은 자들의 요구에 귀를 기울여야 하고 얼마남지 않은 그들의 분열에 걱정과 관심을 쏟는 것도 익숙한 일입니다.
하지만 생각을 해야겠습니다. 말씀이 바뀐적이 없으니 생각이라는 것을 해봐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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