松竹♡소설

진흙탕 속에서 핀 장미 3부

松竹/김철이 2009. 2. 24. 02:47

진흙탕 속에서 핀 장미

 

 

                                                               김 철 이

                                                                시인 /소설가 

 

                      제 3 부

 

 

혜정은 남자를 힘겹게 등에 업은 채 노부부 양철 지붕 집으로 한걸음

에 내달았으며 아닌 밤중에 홍두깨도 아니고, 갑작스레 닥친 소란에

준호와 노부부는 매우 놀랐다.

-아니 색시 이게 웬 일이유?-

-할머니! 자초 지청은 나중에 말씀드릴테니 우선 자리 좀 봐 주세요-
-이거 내 정신 좀 보게, 내가 뒤에서 잡아줄테니 이리 뉘구려. 조심

조심-

남자를 자리에 눕힌 혜정은 물 한 컵을 게 눈 감추듯 마시고 나서 어

떻게 된 연유인지 물으시는 할머니의 물음에 대답하기 시작하였다.

-아니 오늘 밤은 이렇게 지낸다 하더라도, 당장 내일부터 어떻게 할

거유? 색시 혼자 몸으론 신랑 수발만 하여도 벅찰 텐데, 말이유-
-글세요-
-그렇다고 해서 우리 집도 방이 여유가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유-


급한 김에 엉겁결에 길바닥에 쓰러졌던 남자를 업고 오긴 왔는데
당장 몇 시간 후인 내일부터가 걱정이 아닐 수 없었다. “으음 으...무

울 물...” 방 한 모퉁이 벽에 기댄 채 깜빡 잠이 들었던 혜정은 의식을

찾아 물을 찾는 남자의 신음 소리에 놀라 무거운 눈을 뜨니 새벽 4시

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혜정은 남자에게 물 한 컵을 마셔주고는
남자에게 어디에 사는 누구인지, 어쩌다 이곳까지 오게 된 것인지를
차근차근 물어보기 시작하였으나 말을 못하는건지 안하는건지 좀처

럼 입을 열려 하지 않았다. 방이 좁은 시골집인지라 몸이 성치못한

두 남자를 뉘이고 밤이면 밤마다 방 한 귀퉁이 벽에 등을 의지하고

기대어 새우잠을 자야만 했던 혜정은 남자를 노부부 집으로 데려온

지 사흘 되는 날 아침 그렇게도 다정하고 인자하시던 할머니의 입을

통해 청천에 날벼락 같은 말을 듣는다.

 

-색시 이 일을 어쩌면 좋수?-
-할머니 왜요?-

-으응, 다름이 아니라-

-네, 할머니 말씀하세요-
-저어..., 말이유-
-네-
-미안하지만 이젠 우리 집을 떠나줘야 겠수-

-네엣! 할머니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저어, 방을 비워줘야겠단 말이유-

-아니 왜요?-
-색시, 이유는 묻지 말고 내 사정 좀 봐주구려-
-할머니 이 추운 겨울에 몸도 성치 못한 저 두 사람을 데리고 어디로

가란 말입니까......-

 

말끝이 흐려진 혜정은 눈앞이 암흑처럼 캄캄해 왔고 두 줄기 눈물이

볼을 타고 뜨겁게 한없이 흘러내려 가슴을 아리게 하였다. 할 수 없

이 혜정은 이웃 가게에서 리어카 한 대를 빌려 두 장애인의 남자를

태워 노부부의 양철지붕 집을 나와야만 했다. 영문도 모르는 채 갑작

스레 노부부의 집을 나온 혜정과 준호, 그리고 이름이 호태라고 부르

던 그 남자 장애인은 갈 곳도 없이 밖으로 내몰려 엄동설한 혹한을

길거리에서 사시나무 떨듯이 떨어야만 했다. 시간이 얼마간 흐른 뒤

에서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노부부 댁에 갑자기 장애인이 한 사람도

아니고 두 사람이나 있으니 동네 사람들이 노부부에게 압력을 행사

한 것이었다. 아무튼, 자신들의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두 장애

인을 리어카에 태워 이 엄동설한만이라도 피하고 싶어 동네 이곳 저

곳을 기웃거리며 헤매어 봤으나 어느 한 사람 친절하게 말 한 마디

건네주지 않았다. 집에서 개 쫓기듯 쫓겨날 때부터 아예 그런 호화로

운 기대는 걸지 않았으나 사람들이 너무하다는 생각에 혜정은 혼자

마음속으로 눈물을 한없이 삼켜야만 했고 또 다른 마음 한 쪽에선 이

세상 사람들에 대한 증오와 복수심으로 한 여인의 서릿발같은 비수

를 수도 없이 갈곤 하였다.

 

해질 무렵에서야 세 사람이 머물 방을 구하는 것을 포기한 혜정은 준

호와 호태를 리어카에 기대어 잠시 앉혀놓고 근처에 있는 철물점으

로 달려가 비닐과 쇠막대 몇 개를 사들고 인근에 위치한 야산을 향해

리어카를 밀어 올렸다. 두 1급 장애인을 리어카에 태운 채 가파른 산

언덕길을 오르기란 여자의 몸으로는 몹시 힘겨운 일이 아닐 수 없었

다. 이를 악물고 간신히 리어카를 산으로 밀어올리고 비닐과 쇠막대

로 오직 세차게 불어 닥치는 동지섣달 북풍한설과 차가운 밤 이슬로

부터 준호와 호태를 보호해야겠다는 생각 하나로 돌멩이를 주워 몇

개의 쇠막대를 땅속에 박고 비닐로 그 위를 지붕처럼 덮은 다음, 끈

으로 묶어 비닐이 바람에 견딜 수 있도록 고정을 시키고 그 속으로

들어가 앉으니 까마득했던 좀전의 느낌과는 달리 아늑함과 어떻게

자신의 손으로 이런 휼륭한 바람막이를 만들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

을 하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 ‘피식’, 하고 쓴웃음이 입가에 번져 나왔다.
그런 안도의 숨을 돌릴 겨를도 없이 혜정의 머릿속엔 주마등처럼 스

쳐 지나가는 걱정거리들이 있었다. 두 1급 장애인이 나약한 여자인

자신에게 모든 운명을 맡긴 채 자신의 일거수 일투족을 그저 멀끄럼

히 바라보는 것이 마치 새끼에게 먹이를 구해줘야 하는 어미 새처럼
밖으로 나가야만 했다.

 

무작정 비닐 집 밖으로 나오긴 했지만 당장 어디로 가서 두 사람에게

줄 식사 거리를 구해온단 말인가, 혜정은 정말 미칠 것 같았고 피도

살도 나누지 않은 저 두 사람을 왜 굳이 내가 책임을 져야 하는가, 하

는 생각으로 잠시 두 사람을 비닐 집에다 그냥 내버려 두고 산을 내

려가 버릴까? 하는 생각이 정말 꿀떡 같았지만, 어떻게 사람으로서

그런 파렴치한 짓을 할 수가 있단 말인가 하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혜정은 잠시 자신을 심하게 자책하며 눈물로 참회를 하고 종종걸음

으로 산밑 동네를 향해 내려갔다. 저녁 식사때가 훨씬 지난 시간이라

밥은 구하지 못하고 마음씨 고운 동네 한 아주머니로부터 고구마 몇

개를 얻어 자신을 목타게 기다리고 있을 준호와 호태가 있는 비닐 집

을 향해 숨차게 달렸다. 급히 비닐 집 귀퉁이 한 자락을 저치고 안으

로 들어서는 순간 깜짝 놀라고 말았다. 준호와 호태가 퇴색된 낙엽처

럼 이불도 없이 쓰러져 있는 것이 아닌가, 놀란 혜정이 당황하여 두

사람의 몸을 번갈아가며 흔들어 깨우자 가는 실눈을 뜨며 몹시 춥고

졸린다고 했다. 노부부 집에서 나와 종일 굶으며 리어카에 실려 다녔

던 탓에 피로에 지쳐 잠이 들었던 것이었다. 안도의 숨을 내쉬며 얻

어온 음식들을 내놓고 번갈아가며 준호와 호태의 입에다 떠넣어 주

자 준호와 호태는 적지않은 음식들을 순식간에 게 눈 감추듯 먹어 버

렸다. 눈물이 한없이 흘렀으나 두 사람 앞에 나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 몰래 얼른 눈물을 감추었다.

하룻밤을 세차게 불어닥치는 산바람 벗을 삼아 이불 한 채 없이 이곳

저곳 쓰러져 새우잠을 자야만 했다. 시간이 흐르니 세월도 갔고 날이

밝아 아침이 찾아왔다. 차라리 괴로운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은 심정

에 날이나 밝지 않았으면 하는 혜정의 안타깝고 애처로운 심정은 아

랑곳 없이 날이 밝자 혜정은 이불 한 채라도 있어야  살이 여의도록

매서운 산바람이라도 막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 준호와 호태를 비닐

집에 둔 채 산아래 동네로 또다시 내려갔다. 반나절을 동네 이곳저곳

을 헤맸으나 선뜻 이불 한 채 주겠다며 나서는 이 하나 없었다. 점심

때가 되어 비닐 집에서 눈 빠지게 기다릴 준호와 호태가 생각이 떠오

른 혜정은 바지 호주머니 속을 제다 뒤져 백원권 동전 몇 개를 찾아

내곤 환희에 찬 기쁨을 느꼈다. 부유한 부모 슬하에 6남매 중 막내이

자 외동딸로 태어나 온갖 환희, 기쁨 다 누리며 20년이 넘는 긴 세월

을 고생 없이 돈 귀한 줄 모르고 살았는데 동전 몇 개가 이렇게 소중

히 느껴질 줄은 꿈에서도 상상조차 못했던 혜정은 옆으로 스쳐 지나

가는 오토바이 괴음에 정신을 가다듬어 빵 몇 개를 사들고 비닐 집을

향해 종종걸음을 옮겼다. 비닐 한 조각을 저 치고 안으로 들어선 혜정

은 놀라운 일을 목격한다.

 

-혜정씨 어서 와요, 어서 이리 앉아 따뜻한 국밥 좀 먹어요-

준호의 목소리에서 여유로움을 느끼면서 아래로 내려다보니 추위와

허기에 지쳐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준호와 호태의 얼굴에선 미소와

순간적인 여유로움이 번져 나왔고 비닐 집 안에는 따스한 온정이 어

리고 있었다. 비닐 집을 비운 사이 동네 주위에서 리어카를 끌며 고

물 장수를 하던 다리를 조금 저는 장애인 부부가 주위를 지나가다 비

닐 집을 발견하고 호기심에 무심코 집 안을 드려다 보고 다급한 마음

에 고물 장수 장애인 부부는 급히 산밑에 있는 자신의 단칸 월셋방으

로 달려 내려가 급한 대로 다 낡은 이불 한 채와 냄비에 국밥을 끓여

달려온 것이었다. 혜정은 할 말을 잊은 채 슬그머니 일어나 밖으로

나가 정말 따뜻한 인간미 넘치는 참사랑에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준

호에게서 그동안 있었던 모든 일들을 전해들은 고물 장수 장애인 부

부가 혜정을 따라나와 비록 자신들도 가진 것 없고 힘없는 장애인들

이지만 힘닿는 데까지 돕겠다며 소리없는 속 울음만 삼키고 섰는 차

가운 혜정의 두 손을 꼭 잡아주었다. 고물 장수 장애인 부부의 용기

있고 사랑 넘치는 행동에서 용기를 얻은 혜정은 마냥 이렇게 있을 수

만 없다는 생각에 비닐 집을 세울 때 사용하고 남은 쇠꼬챙이로 집 주

위의 주인을 알 수 없는 땅을 조금씩 파헤쳐 나갔다. 추위가 풀리고

봄이 찾아오면 그 땅에다 채소라도 심어 시장에 내다 팔 생각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오늘날의 혜정을 태어나게 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고물장수 장애인 부부가 찾아와 아무런 힘도 경제적 능력도 없는 혜

정에게 부모로부터 버림을 받은 아이 하나가 있는데 잠시만 맡아 보

살펴 달라고 간청하였다. 지금 혜정의 어려운 형편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아는 부부가 그런 말을 하니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자초지종 얘기

를 듣고 난 혜정은 부탁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아이는 열

두 살 된 뇌성마비 남자아였는데 부모가 이혼하여 엄마와 함께 살다

가 엄마에게 다른 남자가 생겨 재혼을 하려니 그 남자가 아이를 맡을

수 없다고 하여 오갈 곳이 없어진 아이가 길가에 돌멩이 하나 굴러다

니듯 하루하루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것을 보다못해 데려왔다는 것

이었다. 순간 혜정은 내가 무슨 장애인 복지시설의 원장도 아니고 그

렇다고 해서 내가 돈을 많이 가진 것도 아닌데 동네에서 버림받은 장

애인들을 내게로 데려오면 어쩌란 말인가 하는 생각에 자신도 모르

는 사이 화가 났다.

 

-아니, 아주머니 그렇다고 해서 제게로 데려오면 저는 어떻합니까?-
-아니, 혜정씨에게 어쩌란 것이 아니라 당분간만 해서-
-그래도 그렇죠. 당장 우리도 먹을 것을 제가 구걸하다시피 하여, 겨

우 먹을 것을 얻어오는 걸 누구보다 아주머니께서 더 잘 알잖아요?-
-암, 알죠-
-그걸 아시는 분이 왜요?-
-응, 그건 말이유 이 아이가 당장 갈 곳이 없으니 단 며칠만이라도

혜정씨가 두 분과 함께 데리고 있으면 다른 장애인 복지시설을 알

아보겠고, 또, 그동안, 이 아이 밑으로 들어가는 비용은 우리 부부가

조금씩 돕기로 하고, 말이유-
-그래도 저는 그 일만은 못하겠어요-
-그럼 하는 수 없지요, 뭐-

 

아이를 데리고 힘없이 밖으로 나가는 부부의 뒷모습에서 준호를 데

리고 집으로 갔다 개 끌듯 내쫓겼던 자신의 모습을 본 혜정은, 부부

를 조그맣게 불러 세웠다.

 

-저... 저 좀 보세요-
-왜요? 혜정씨-
-며칠이이면 되죠?-
-그럼요! 며칠만이라도 데리고 있어준 게 어딘데-
-그럼, 며칠만 저희와 함께 지낼게요-
-정말요? 고마워요, 며칠 후 아이가 지낼 곳을 마련해서 꼭 데려 갈

게요-

 

단 며칠에 불과하지만, 아이와 함께 지내기로 하니 준호의 입가에 이

유를 알 수 없는 잔잔한 미소가 번져 나왔다. 준호는 혜정의 마음속

에 진정 따뜻한 정이 흐르고 있음을 느꼈다. 얼마 전부터 자신의 가

슴에 심고 그 싹을 피우기 위해 물 주어 오던 정원에 정원사로 혜정

이라면 한 점 손색이 없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어

느 밤 준호는 혜정의 본심을 떠보려고 말을 건넸다.

 

-저, 혜정씨!-
-네-
-우리 이제 여기서 이렇게 영원히 사는 겁니까?-
-글세요, 지금으로썬 어쩔 도리가 없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다른 이에게 얻어먹는 것도 하루 이틀이고 거지도

아니고 혜정씨 고생하는 것도 이젠 못보겠고-
-그럼, 뾰족한 방법이라도 있으세요?-
-해서 얘긴데요-
-네-
-우리 이제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는 뚜렷한 방안도 없고 하니-
-네, 말씀해 보세요-
-저...혹시 장애인 공동체에 대하여 들은 일 있어요?-
-아뇨, 그저 신문기사에 난 보도를 지나가는 눈길로 몇 차레......-
-네...-
-아니,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 묻죠?-
-그걸 우리가 해 보면 어떨까 싶어서요-
-네엣! 우리가요?-
-그래요, 우리가요-
-우리가 한다고 해서 안될 건 없잖아요?-
-그 일도 얻어먹는 건 마찬가지잖아요, 크고 작은 차이가 있을 뿐이

지-

 

말로는 그렇게 했지만 혜정도 지금 현 상황에서 한시 빨리 벗어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리고 또 며칠이 지났고 고물장수 부부가 며칠 전 맡겨두었던 아이

를 충주에 있는 어느 장애인 공동체에 데려다 줄 거라며 며칠 전 그

아이를 데리러왔다. 아이를 데리고 비닐 집을 나서려 할 때 혜정은

왠지 모르는 정에 이끌려 자신도 모르는 사이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

내렸으며 그 아이 또한 며칠 동안이나마 정이 들었든지 헤어지기를

싫어하며 혜정의 손을 놓지 않으려 안간힘을 다 썼다. 아이를 억지로

혜정의 손에서 떼 밖으로 데리고 나가자 끝내 혜정과 아이는 울음을

터뜨렸고 아이와 비닐 집 가족들과의 헤어짐은 언제가 될는지는 몰

라도 연기되었다. 그 후 며칠이 지난 어느 몹시 추운 날이었다. 그 날

은 갑자기 혹한이 전국적으로 몰아닥쳐 우리나라 전국이 온통 꽁꽁

얼어있었다. 그랬기에 없는 이들은 있는 이들보다 몇 배 더 추위를

느껴야 했었고 그 없는 이들의 대열 중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갈 비닐

집 가족들 또한 지독할 정도의 체감온도를 느껴야 했었다. 준호와 혜

정을 비롯한 비닐 집 네 사람의 가족은 걸인은 아니지만 이웃의 도움

으로 하루하루를 근근이 살아가고 있었다. 아직 햇살이 닳지 않아 한

점의 산바람도 열 점의 도심지 바람보다 몇 배로 추위를 느끼게 하는

늦은 아침, 혜정은 전날 저녁 이웃의 한 할머니께서 갖다주신 고구마

몇 알로 가족들의 아침식사 대용으로 구워먹이기 위해 살을 에이는

듯한 산바람도 아랑곳없이 비닐 집 밖 한 모퉁이에서 막 모닥불을 피

우려 할 때 준호가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 급히 안으로 들어가 보니
전날 저녁식사로 먹었던 군고구마가 잘못되어 구토와 설사를 연이어

마치 수돗물처럼 쏟아내어 놓는 것이 아닌가, 크게 놀라 어찌할 바

몰라 허둥대고 있을 때 며칠 전 들어온 아이가 더듬거리는 말투로 자

신의 윗도리 호주머니 속에서 작은 콩알만 한 크기의 이름 모를 까만

색 환약 한 알을 꺼내 놓는 것이었다. 이름과 약의 효능도 모르는 채

다급한 나머지 뒤에 닥쳐올 어떤 상황도 생각할 여가도 없이 약을 준

호에게 먹였는데 그렇게 심했던 구토와 설사 그리고 심한 고통 속에
두어 시간이 물처럼 흘러갔고 끝을 모른 채 심해만 가던 준호의 앓는

소리는 점차 약해져 갔으며 시간이 얼마쯤 더 흐른 뒤 언제 그랬느냐

는 듯 말끔히 씻어져 갔다. 한 때의 큰 태풍은 사라져 갔고 그 사건이

있은 후로 아이와 비닐 집 가족들 사이는 더욱 친숙해 졌는데 시간이

흐르고 날이 갈수록 혜정의 가슴 한 켠에서는 크디 큰 걱정의 검은

꽃씨가 움터 자라기 시작하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