松竹♡소설

진흙탕 속에서 핀 장미 1부

松竹/김철이 2008. 7. 7. 12:18

진흙탕 속에서 핀 장미

 

 

                                                                                김 철 이

                                                                          시인/소설가/수필가 

 

 

                                        제 1 부

 

 

준호는 이제 인생 황혼길로 들어선 시점에서 아내의 도움으로 넓은

마당에 나와 앉아 뽀얀 아침안개를 너른 품에 안은다. 그저 묵묵히

시간 따라 흘러가는 대자연의 큰 사랑을 바라보며 그는 온갖 시련을

겪어 온 50년 인생을 잠시 돌이켜 본다.

준호의 고향은 충청도인데 세월의 흐름 따라 살다 보니 이곳 경기도

까지 오게 된 것이다. 6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으나 어릴 적 뇌성마

비로 1급 장애인이 되어 본인의 손으로는 밥 한 술 떠먹을 수 없는 몸

이 되었다. 비교적 부유한 부모님을 두었던 탓에 어린 시절엔 고생 없

이 지낼 수 있었다. 어느날 이웃의 동갑내기 한 사내아이가 우연히

준호네 집으로 놀로와 식사를 하게 되었다. 어머니께서 떠 주는데로

밥을 먹던 준호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그 아이는 머뭇머뭇

하며 식사를 하려 하지 않았다. 함께 놀러 온 다른 아이들에게 더러

워서 준호랑 함께 밥을 먹을 수가 없다는 말을 뒷전에 남기고 벌떡

일어나 돌아가 버리는 것이었다. 그러자 다른 아이들마저 자리를 박

차고 일어나 제각기 집으로 돌아가 버리고 갑자기 텅 빈 마당은 제

나이보다 커 보이기 시작했다. 준호 나이 9세 때 처음으로 자신이 장

애인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게 해주는 사건이 생겼다. 이런 광

경을 보신 어머니는 너무나 가슴 아파 준호가 보는 앞에서 눈물을 흘

리셨으며 준호는 이 일로 인해 큰 충격을 받는 며칠 동안 앓아 눕기

도 하였다. 그 일이 있은 후 동네 아이들의 발걸음은 완전히 끊어져

버렸고 가끔 준호를 등에 업고 바람을 씌어주시던 어머니도 단 한 번

준호를 밖에 내놓지 않았다. 어러한 나머지 준호의 창살 없는 감옥

의 옥살이 아닌 옥살이가 스무 해 동안이나 계속 되었다. 부유했던

가정 형편이라 하였을 지라도 준호를 바깥나들이 한번 시켜줄 수도

없었다. 준호를 구박하고 눈치를 주었던 이들은 오히려 남들보다 같

은 피를 나누어 태어난 형제들이 더욱 심했었고 준호는 무엇보다 이

같은 일들이 가장 가슴 아프고 견디기 힘들었다. 준호 역시 이 세상

에서 숨쉬며 살아가는 한 인간임에 틀림이 없었으므로 세월이 흐름

면서 먹어가는 나이와 병든 육신도 점차 자라갔으며 생각 또한 자라

고 있었다.

준호 나이 19세 되던 어느 해 어느 날이었다. 어머니가 밭일을 나가

신 틈을 타서 친형제, 자매보다 더 준호를 따르고 보살펴 주던 같은

마을에 사는 두 살 아래의 영호라는 아이가 찾아와 준호에게 담배를

배워보지 않겠느냐는 말을 하였다. 순간, 준호는 정말 어처구니가 없

었다. 화장실 나들이는 커녕 자신의 손으로  밥 한 술 입으로 떠넣지

못하는 자신에게 담배를 피우라고 하다니말이다. 준호는 버럭 화를

내며 큰 소리를 질렸다.


- 야 너 지금 누굴 놀리는거냐! -
- 형 누가 형을 놀려, 형 오해 마 -
- 너 지금 날 놀리는 게 아니고 뭐냐?...
- 내 손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내게 담배를 피우라는 게 놀리는
게 아니고 뭐냐?

- 아 그거, 그건 말이야. 내가 자주 놀로와 형에게 담배를 피우게 해

주면 되잖아. 기분이 울적할 땐 담배가 최고거든 -

순간 준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영호의 도움

으로 담배를 배우게 된 준호는 가슴이 터질 듯 답답할 때면 가끔씩

영호를 자신의 집으로 청하여 함께 담배를 피우며 마음을 달래곤 하

였다. 담배는 거의 날마다 가슴 조이며 19년 동안 살아온 준호의 마

음을 아무런 허세와 과식 없이 진정으로 위로 해 주는 위로자 역할을

충분히 해 주었다. 그 후 준호와 영호는 친형제, 자매보다도 더 가까

워졌고 영호는 거의 날마다 준호네 집을 찾았으며 때로는 답답해 하

는 준호를 등에 업고 바깥바람도 씌어주곤 했다. 자신의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1급 장애인을 아직 성인에 비해 모든 것이 부족한 소

년으로선 다루기가 무척 힘겨운 일이었으나 영호는 몸과 마음을 다

한 정성으로 봉사하였다. 그 진한 두 남자의 우정속에서 세월은 흘러
이제 나이가 들고 청년기에 들어섰다. 그 사이 준호의 동생들은 혼기

가 되어 몇 차례 혼담이 오갔으며 그럴 때마다 상대편에서 장애인을

둔 집안과는 사돈을 맺을 수가 없다고 하며 번번이 퇴짜를 놓곤 하였

다. 그때마다 찢어지고 매여지는 준호의 심정 어찌 말로만 다 표현할

수 있었으랴. 부모님과 형제들은 원망 섞인 눈초리로 바라보는 따갑고

매서운 시선들에 미안하고 죄송한 마음으로 가득 차 있었을 뿐이었
다. -너 때문에 동생들 혼사길 막히겠다-며 취중에 마구 욕설을 퍼

붓는 아버지의 호된 꾸지람에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었던 심정은 정

말 죽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해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큰동생이 맞선을 보러 간다며
가족들은 아침부터 요란스럽게 부산을 떨었다. 그러나 준호의 마음은

마치 큰 죄를 지은 죄인처럼 쥐구멍이라도 찾을 수 있으면 찾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맞선을 보고 돌아온 저녁 온 집

안이 난리가 난 것이었다. 맞선을 본 아가씨에게 솔직히 장애인 형님

이 계신다고 말하자 다음에 또다시 만날 기약은 커녕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 버렸기 때문이다. 홧김에 만취가 되어 돌아온 큰동생은 다른

동생들을 불러 모아놓고 -너희들도 결혼 할 생각 아예 하지 말라-며
술주정 아닌 마음속에 맺힌 한을 털어놓았다. 큰동생의 넋두리를 듣

고 계시던 어머니는 비장한 각오라도 한 듯 한동안 굳게 입을 다물고

계시다 입을 열었다. -준호야! 동생들을 위해서 네가 우리 집에서 나

가줘야겠다. -는 이 한마디 말씀에 아연실색하여 할 말을 잊었고 마

른하늘에 청천병력과도 같았다. 제 몸 하나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제

손으로 밥 한 술 입에 떠넣지 못하는 장애인의 아들을 어디로 나가란

말인지 말이다.

그 당시만 하여도 요즘처럼 장애인 복지 시설이 흔치 않았던 탓에 준

호의 고민은 하늘을 찌르고 한숨소리는 강을 이루었다. 하루는 준호

가 영호를 불러 자신이 처해있는 지금의 입장을 의논하였다. 얘기를

다 듣고 난 영호는 자신이 준호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어줄 수 없음을

슬퍼하며 자신이 결혼할 때 까지만 기다려 주면 안 되겠느냐고 했다.
자신이 결혼을 하게 되면 준호를 친 형님처럼 모시고 살겠다는 것이

었다. 그러나 그 또한 실현 가능성이 전혀 없는 일이었다. 그러던 중

하루는 어머니의 불같은 성화에 이기지 못한 준호는 내심 굳은 결심

을 하게 된다. 그러나 그 결심을 실행에 옮기기 전 영호를 불러 며칠

후 자신이 어딜 좀 다녀올지 모른다며 그동안 자신에게 베풀어 주었

던 헌신적인 봉사와 사랑에 진정 감사하였다고 한다. 새삼스런 준호

의 행동을 이상하게 여긴 영호는 준호 말의 진의를 물었으나 준호는

묵묵부답이었다.

그날로 부터 사흘 후 아침 일찍 밭일을 나가시는 어머니를 불러 앉혀

놓고, -어머니! 제가 집을 나갈 테니 제게 현금 5만 원만 주세요-라
고 말씀드렸다. 그 동안 준호에게 불같은 성화를 부리셨던 어머니께

서 막상 준호가 제 능력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장애인 아들이

단신으로 집을 떠나겠다고 하니 억장이 무너지는 듯 하였으나 다른

자식들을 위하여 속울음을 우시며 가슴 메이는 눈물을 삼켜야만 했다.

어머니께서 윗도리 호주머니 속에 넣어주시는 5만 원을 가지고 끝내

준호는 이웃에 사는 힘센 한 청년의 등에 업히게 된다. 30년이 넘는

시간의 공간 속에서 자신의 잔뼈를 키워 온 정든 집과, 지금은 비록

차갑고 냉정하게 대하지만 그래도 자신을 이 세상에 낳아주신 어머

니를 뒤로 남긴 채 당장 내일을 알 수 없는 미정의 세계로 떠나야만

했다

준호를 등에 업고 마을 어귀까지 나온 이웃 청년은 동구 밖 차가운

길바닥에 내동댕이 치듯 내려놓곤 마을을 향해 도망치듯 종종걸음을

옮겼다. 차디찬 12월의 한 길가에 내버려지듯 내려 놓인 준호는 앉지

도 못하는 병든 육신에 동장군이 몰아다 준 얼음바람을 품기 시작했

다. 누인 채 수 없이 오가는 행인들의 발걸음을 올려다 보며 저렇게

많은 사람들 중에 자신 하나 받아들여 보살펴 줄 한 사람 없으니 정

말 이 세상이 싫고 원망스러워 자신도 모르는 사이 남자의 뜨거운 눈

물이 두 볼을 흘러 내려 얼음 먹은 겨울 찬 땅을 녹였다. 하늘이 무너

지고 땅이 꺼지는 듯한 설움에 복받쳐 한참 동안 울고 또 울다 정신

을 차려 하늘은 올려다 보니 저녁 해가 뉘엿뉘엿 서산마루에 걸터앉

아 막 하루를 접으려 하고 있었다. 이래서는 길바닥의 찬 공기에 얼

어 죽겠다는 생각이 든 준호는 길가던 남자 한 사람을 불러 지나가는

택시 한 대만 세워달라는 부탁을 하였고 준호의 간청을 쾌히 승낙한

행인은 친절하게도 손수 준호를 안아 택시에 태워주며 부디 건강하

시라는 아름다운 위로의 말도 잊지 않았다. 고맙다는 감사의 말을 남

긴 준호는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 보는 행인의 다정한 모습을 뒤로하

고 택시에 몸을 담아 행선지도 없이 어디론지 달려갔다.

잠시 후 행선지를 묻는 택시 기사에게 준호는 -내 위 호주머니에 차

비를 드릴 돈은 있으니 기사님이 가시고 싶은 곳에다 저를 내려주시

면 됩니다-라고 말하자, 택시 기사는 으아해 하며 준호가 하자는 대

로 하였다. 한참 동안 택시를 몰아 대전 시가지를 달리다가 비교적 인

파가 분비는 대전역에 준호를 내려두고 택시기사는 어디론지 사라져

갔다. 대전역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에 누워 세상을 바라다 보니 이

세상이 그렇게도 아름답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바로 그때였다. 차디

찬 시멘트 바닥에 누워있던 귓전에 저 멀리 어디선가 들려오는 아름

다운 소리가 있었으니 인근 성당에서 들려오는 종소리였다. 그 종소

리에 마음이 이끌려 또다시 지나가던 한 행인에게 부탁하여 택시를

타고 그 종소리의 흔적을 쫓아 데려다 달라고 하였다. 인간의 영혼을

부르는 듯한 은은한 종소리에 이끌려 택시 의자에 의탁하여 그 종소

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향해 한참을 달렸다. 얼마 후 택시가 세운 곳

은 천주교 성당이었다. 택시 기사는 준호를 자동차에서 내리려 하며

물었다.


- 저어, 어디다 내려드릴까요? -
- 네, 저는 잘 모르니 기사님께서 알아서 내려주세요. -
- 네, 저도 이곳 사정은 잘 모르지만 천주교 신자들이 기도하는 곳에

다 내려드리죠 -
- 네, 그렇게 해 주세요. -


택시 기사는 천주교 신자들이 미사를 드리는 성전 마룻바닥에 내려

놓았다. 본래 장애가 심한 편이었으므로 제대로 앉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성전 마룻바닥에 허리를 구부리고 웅크린 채 옆으로 누워있

었고 준호의 윗도리 호주머니 속에서 택시 요금을 꺼내 든 택시 기사

는 일그러진 준호의 모습이 걱정이 되는 듯 휠끔휠끔 뒤를 돌아다 보

며 성전을 빠져나갔다. 한참 동안 성전 마룻바닥에 누워있던 준호는

바닥에서 올라오는 찬 기온 탓에 온몸이 욱신욱신 쑤셔왔고 으실으

실 한기마저 점차 들기 시작했다. 허기와 추위와 외로움에 지쳐 시간

이 흐를수록 온몸이 굳어져 갔고 정신마저 혼미해져 갔다. 아무도 보

이지 않는 성전 마룻바닥은 너무 차갑고 썰렁하게 느껴졌고 그 상황

에서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있는 자유조차 부여되지 않은 자신의 참혹

한 생이 너무나 비참했다. 너무 서럽고 한스러워 소리도 내지 못한

채 한동안 “꺽꺽” 대며 속울음을 삼켰다. 한참을 울고 나서 난생 처음

기도라는 것을 해 봐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웅크린 몸을 누인 채

십자가에 못 박혀 높이 달리신 예수님상을 향하여 마음껏 힘을 내어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 예수님, 저는 지금껏 당신을 믿지 않았습니다. 아니 더욱 정직하게

말씀드리면 당신을 거부해 왔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의 입을 통해

들은 말로는 당신은 죄인들을 사랑하시고 힘없고 나약하고 부족한

사람들을 사랑하신다고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저의 바램도 들어주실

수 있는지요? 당신은 사람들의 생각마저도 알고 계신다고 들었고 모

든 죄지은 자들을 용서하신다고 들었습니다. 그럼 당신은 지금 제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도 알고 계시겠네요? 더

욱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지금 제 곁에 다른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당신께 이런 기도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도 저의 기

도를 들어주시겠다면, 제 마음 당신께 드리고 제 정성을 다하여 기

도하겠습니다. 당신은 이 세상 사람 하나하나의 생각을 아시고 계신

다니 제가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도 잘 알고 계시라 믿고 말씀드

립니다. 열 달 동안 배속에 담아 자신의 분신처럼 소중히 간직하고
이 세상에 낳아주신 제 어머니와 저와 함께 같은 피를 나눈 형제들도
저를 배척하고 버리기까지 하였는데, 제가 과연 그들을 용서할 수 있

을까요? 아니 제가 그들을 용서해! 야 합니까? 당신은 모든 죄인을

용서하시고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도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다

들었습니다만 저는 지금 당장 갈 곳은 커녕 제 몸 하나 의탁할 곳도

없고 지금 당장 저녁 한 끼 먹여줄 한 사람의 손길조차 없답니다. 만

약 당신이 지금 제 마음을 아시고 제 기도를 들어주신다면, 제가 지

금 몹시 배가 고프니 밥 한 끼만 먹여 주십시오. 그렇게만 해 주신다

면 제 목숨 다할 때까지 당신을 믿겠습니다. -

이렇게 횡설수설하며 정말 인간적인 기도를 하고 있을 그때였다. 멀

리 있는 사람의 가는 숨소리마저 들릴 듯한 고요한 성전 안 어디에선

가 아주 작은 인기척이 나더니 자박자박 발걸음 소리가 들리는 듯 했

다. 잠시 적막이 흐르는 듯 싶더니 또다시 몇 걸음의 작은 발걸음 소

리가 났고 웅크리고 누워있는 준호앞에 멈추고 누군가 준호를 내려

다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힘없이 가늘게 눈을 뜨고 위를 올

려다보는 순간, 자신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사람이라고는 그림자도 없고 적막만이 감도는 성당 안이

라 믿었는데 준호의 눈앞에는 가냘프게 생긴 한 아가씨가 그저 아무

말 없이 우두커니 준호를 내려다보고 서있는 것이 아닌가. 집은 부

산이고 대전 외가에 다니러 왔다가 기도가 하고 싶어 성전 앞자리에

서 두 손과 마음을 모으고 있었다고 했다. 서울 모 여대 미술학과 3학

년에 재학중이던 혜정이라는 아가씨의 귓전에 “평생 네가 손과 발이

되어 주어야 할 사람이 이곳에 와 있노라”하는 고요한 음성이 들려와

혹시나 하여 성전 이곳저곳 찾아다니다 성전 찬 마룻바닥에 웅크리

고 누워있던 준호를 발견하게 된 것! 이다. 준호를 처음 발견했을 땐
그만 놀라 소스라치게 소리를 지를 뻔 했던 혜정은 조심스럽게 한 걸

음 한 걸음 준호의 곁으로 다가서서 조용하게 말을 건넸다.

혜정:저어- 아저씨, 왜 이곳에 누워계셔요?
준호:네에- 저-
혜정:아저씨 어디서 오셨나요?
준호:몰라요.
혜정:어디서 오셨는지도 몰라요?
준호:네, 저 집 없어요.
혜정: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집이 없다뇨, 세상에 집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나요?
준호:네 저는 없어요, 그리고 장애인이 어디 사람인가요?


혜정은 준호의 말 한 마디에 가슴이 찌어질 듯 아팠다. 준호의 말에

말문이 막혀 잠시 말을 잊고 있을 때 준호가 힘없는 목소리로 혜정에

게 말을 건넸다.

준호:저어- 아가씨, 제가 지금 배가 몹시 고프거든요.
혜정:아,네
준호:저어-그래서 말인데요, 아가씨가 제게 밥 한 그릇만 사 주실

수 있나요?
혜정:진작 말씀하시지, 사 드리죠, 어서 일어나세요, 제가 부축해 드

릴게요.
준호:저어- 실은 제가 걸을 수가 없답니다.
혜정:넷! 아니 그럼 이곳까지 어떻게 혼자 오셨나요?


준호는 집에서 나오게 된 이유만 빼놓고 성전안에 까지 오게 된 과정

모두를 혜정에게 얘기하니 너무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어 잠시 할 말

을 잃었다. 잠시 후 혜정이 다시 준호에게 물었다.


혜정:그럼 제가 어떻게 해 드려야 되죠?
준호:네, 죄송하지만 아가씨가 저를 업을 수가 있겠는지요.
혜정:네, 해 보지요.

혜정은 가냘픈 여자의 몸으로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버린 마치, 바위

처럼 무거운 준호의 몸을 간신히 등에 업은 채 불꺼진 성전 계단을

더듬거리며 밑으로 내려갔다. 젖먹던 힘 아니 죽을 힘을 다해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무거운 남자인 그것도 몸을 제대로 움직일 수 없어 더

욱 무거운 1급 장애인을 업고 간신히 2층 성당 성전 계단을 내려와

밖으로 나온 혜정은 성당에서 가장 가까운 분식점을 찾았다. 그런데
분식점에서 음식을 먹고 있던 사람들이 하나같이 힐끔거리며 준호와

혜정을 번갈아 가며 훔쳐보는 것이었다. 혜정은 우선 몹시 배고파 하

는 준호의 허기부터 채워 줘야겠다는 생각에 밥과 함께 국을 시켜 준

호에게 한 술 한 술 떠먹여 주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혜정은

준호가 가엾다는 생각이 들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마구 눈물이 흘

러내려 식사를 할 수가 없었다. 너무 허기가 졌던 탓에 다른 이들의

눈도 의식하지 않은 채 허겁지겁 혜정이 떠 먹여 주는 밥과 국을 받

아먹었다. 식사를 마친 두 사람은 이제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를 고

심하게 되었다.

혜정:저, 어디 가실 곳은 있으신가요?
준호:아뇨, 없어요.
혜정:그럼 어떻게 해요?
준호:글세요.
혜정:전 지금 외가로 들어갔다 내일 서울로 올라가야 하는데......
준호:그럼 저를 아무 곳에나 데려다 놓고 가세요.
혜정:그럴 수는 없지요.
준호:그럼 어떻게 해요, 다른 방법이 없는걸.

혜정은 하는 수없이 음식점 주인에게 도움을 청해 준호를 다시 등에

업은 채 인근 여관을 찾아 들었다. 낮 동안 허기와 추위와 외로움에

지쳐 곤히 잠든 준호를 내려다 보며 앞으로의 일들을 생각하니 정말

막막하기만 하였다. 까만 밤을 하얗게 지새운 혜정은 날이 밝자 여관

밖으로 나가 빵 몇 개와 우유를 사들고 돌아와 준호에게 먹여놓고 잠

시 기도를 바친 후 준호를 업고 서울행 열차를 타기 위해 대전역으로

향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