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교구 160

말씀의 이삭 | 오늘의 달리기를 시작하며

오늘의 달리기를 시작하며  “단주를 시작한 지 꽤 여러 날이 지난 지금 시점에서도 여전히 술에 대한 갈망이 생깁니다. 참기가 힘들고, 때때 로 나도 모르게 그 유혹에 넘어가서 모든 걸 망쳐버리지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저만 계속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걸까요?” 진료실에서 만나는 많은 분들이 묻습니다. 온전히 술에 서 벗어난 삶, 고요한 일상을 보내는 게 가능할지, 그 시기 가 언제쯤 오는 것인지, 왜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같은 느 낌을 받는 것인지 통 알 수 없다는 질문과 함께 말입니다. 저 역시도 비슷한 고민을 한 적이 있습니다. 몇 년 전 부터 아이들과 함께 일찍 자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기 상 시간이 앞당겨졌습니다. 그렇게 생긴 여유를 활용해 새벽 산책이나 할까 하면서 운동화를 챙겨 신고 밖으로..

세대간 소통 2024.10.08

모두 한 분에게서 나왔습니다 | 이경상 바오로 주교님(서울대교구 보좌주교)

모두 한 분에게서 나왔습니다                                                                이경상 바오로 주교님(서울대교구 보좌주교)  오늘 말씀의 전례는 혼인의 신성함을 언급하는 내용입 니다. 그런데 말씀을 묵상하면서 염려가 됐습니다. 혼인 에 실패하였고 도무지 현실적으로 회복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인 사람들에게 이 말씀이 혹시라도 소외감을 느끼게 하 거나, 이해심이 부족한 종교가 원망스럽다며 하느님과 교 회를 떠나게 하는 이유가 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 말입니 다. 그러나 말씀의 취지는 더 깊은 데 있습니다. 오늘 복 음에서 사람을 시험하려고 질문을 던지는 바리사이파 사 람들은 생명의 본질을 일깨워주시는 예수님의 태도와 대 조를 이룹니다. 모세가 이혼장을..

사제의 공간 2024.10.05

말씀의 이삭 | 성모님의 눈물

성모님의 눈물  그해의 성탄 전야 미사를 저는 어느 대형 성당에서 맞 았습니다. 성당 입구는 미리 온 신자들로 가득했고, 저처 럼 늦게 온 신자들은 지하 성당으로 내려가 미사를 보라 는 거였습니다. 우르르 몰려가 지하 성당에 자리를 잡고 바라보니 앞에는 미사 중계용 대형 TV 모니터가 설치되 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러나 이럴 수가! 그 모니터에 는 커다랗게 ‘고장’이라고 쓴 A4용지 한 장이 털썩 붙여 져 있었습니다. 대림 기간 동안 이 성당은 모니터는 고치 지는 않고 ‘고장’이라 쓰고나 있었단 말인가. 미사가 시작되고, 지하 성당의 우리들은 화면도 소리 도 먹통인 고장 난 모니터를 바라보며 묵묵히 앉아 있었 습니다. 그렇게 얼마가 지났을까. 대성당으로 통하는 문 옆에 앉아 있던 자매 한 분이 모깃소..

세대간 소통 2024.10.01

말씀의 이삭 | 과달루페의 성모님

과달루페의 성모님  세례를 받고 난 사흘 후, 저는 중국 상하이 공항에 홀 로 앉아 손톱을 물어뜯고 있었습니다. 손톱을 물어뜯는 버릇이 생긴 건 초등학교 4학년 때, 어쩌다가 그런 버릇 이 생겼는지 무언가 초조할 때도, 하릴없이 혼자 있을 때 나 하다못해 신문을 읽을 때까지도 어김없이 손톱을 물어 뜯으며 지냈습니다. 손톱을 깎아본 적이 없습니다. 세례를 받았다는 설렘과 이제부터 천주교 신자로 어떻 게 살아갈지 스스로를 다독이면서도 퇴퇴 손톱을 물어뜯 으며 앉아 있던 그때, 그냥 주님께 말했습니다. “주님, 이 제 제가 주님의 아들이 되었잖아요. 주님께서 주신 몸을 제 이빨로 제가 물어뜯어 퇴퇴 내뱉고 있는 이 버릇! 이거 좀 안 하게 해 주세요. 저도 지겹거든요.” 탑승 안내 방송을 들으며 비행기에 오른..

세대간 소통 2024.09.25

말씀의 이삭 | 용서를 위하여

용서를 위하여  최양업 신부님의 생애를 그리는 소설 《아, 최양업》의 연재를 시작한다는 말씀을 드리고 제가 청주교구 장봉훈 주교님 앞에 무릎을 꿇었을 때였습니다. 주교님이 탄식처 럼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하시는 일의 오묘함이라니⋯.” 최 신부님의 숭고한 생애를 널리 세상에 알리기 위해 소설이나 드라마는 어떨까, 그런 생각으로 주교님은 오래 전부터 그 분야의 전문가를 찾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 랬는데 자신도 모르는 어딘가에서 소설가 하나는 또 소설 을 준비하고 있었다니. 이것이 다 주님께서 하시는 일의 오묘함이 아니겠는가 하는 탄식이었습니다. 주교님의 축복과, 기도 중에 기억해 주실 것을 간절히 청하고 주교관을 나왔습니다. 주차장에는 드넓은 광장이 햇빛 속에 펼쳐져 있었습니다. 그 순간, 빛의 화살..

세대간 소통 2024.09.17

말씀의 이삭 | 내가 부를 백조의 노래

내가 부를 백조의 노래  김수환 추기경님의 이야기를 담은 책 《용서를 위하여》 를 펴냈을 때였습니다. 잘 아는 스님 한 분이 그 책 여러 권을 사서 가까운 분들에게 보내드린 일이 있었습니다. 그 후 들려온 말이, 제 가슴에 칼이 되어 꽂혔습니다. 스님이 그분들에게 읽고 난 소감을 물었더니, 책 이야기 는 없이 첫 마디가 대뜸 “이 사람, 아직 살아 있어?” 하더 랍니다. 이제 저도 그 나이가 되었나 봅니다. 매일매일 나이만 큼 절망하고, 나이만큼 분노하고, 나이만큼 허무해지면서 살아갑니다. 오늘이 어제 같지 않았으니 내일은 또 어디 만큼 달라지려나. 어쩌다, 상식이 저주받는 이 겸손조차 없는 시대가 제가 맞고 있는 노년입니다 제가 60이 되었을 때였습니다. “그런가, 자네도 벌써 그 나이가 되었나. 60..

세대간 소통 2024.09.03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 정순택 베드로 대주교님(서울대교구장)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정순택 베드로 대주교님(서울대교구장)  오늘은 연중 제22주일이자 9월 ‘순교자 성월’에 맞는 첫 번째 주일입니다. 또한 매년 9월 1일은 ‘피조물 보호를 위한 기도의 날’이기도 합니다. ‘공동의 집’인 지구 환경을 지키기 위해 2015년부터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동방 정교회에서 먼저 시작한 이 기도의 날에 우리도 동참하도 록 정하셨습니다. ‘피조물 보호’는 왜 필요할까요? 우리 인간은 ‘자연의 정복자’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자연환경과 공존, 공생해야 하..

사제의 공간 2024.08.31

선택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작은 형제회_프란치스코회)

선택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작은 형제회_프란치스코회)  “누구를 섬길 것인지 오늘 선택하여라.”(여호 24,15)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한 말입니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수없이 선택을 요구 받습니다. 그 요구는 실타래, 연 필, 활, 쌀, 돈 등을 놓고 치르는 어린 시절 돌잡이에서부터 시작합니다. 그리고 아이 때부터 시작된 우리의 힘든 선택 은 인생 전체를 아우르며 계속됩니다. 어느 학교에 들어가 야 할지, 어느 직업을 택해야 할지, 어느 배우자를 선택해야 할지, 심지어 매일 같이 먹어야 하는데 무얼 먹어야 할지…. 다시 돌잡이 얘기로 돌아가 지금 그 가운데 하나를 집 어야 한다면 여러분은 무엇을 고르시겠습니까?..

사제의 공간 2024.08.27

말씀의 이삭 | 기도를 커지게 하는 것들

기도를 커지게 하는 것들  상당히 아날로그적이지만 시각적, 후각적으로 충격과 파급력이 큰 오물 풍선 사건이 연일 터지면서 한동안 잠 잠하던 북한 관련 뉴스가 우리의 관심을 끕니다. 저에게 북한은 남다르게 다가옵니다. 작년에 돌아가신 친정 아버 님이 개성 출신이시고, 저 또한 개성에 성당을 세웠다는 자부심이 세뇌(?) 수준으로 강한 집안의 자손이기 때문입 니다. 피난 때 들고 나온 개성성당 사진을 복사해서 우리 가족들은 모두 한 장씩 나누어 소장하고 있습니다. 이 역 시 우리 집안의 신앙적 자부심인 거죠. 미술을 전공하고 아트를 주 무기로 살아가는 저는 한 때 코트라(KOTRA: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에서 크리에이티브 디 렉터로서 아트 콜라보 사업(예술과 기업, 예술과 제품을 연결하여 부 가가치를 올리도록 하..

세대간 소통 2024.08.27

말씀의 이삭 | 성모님이 찾아오시는 창조적 방법

성모님이 찾아오시는 창조적 방법  “어떻게 살지? 미술이 내 인생의 최선이 맞나?”를 고민 하며 절도 찾아가고, 머리 깎고 산으로 들어가겠다며 스 님을 붙들고 떼쓰고 소란을 피우던 시절, 불교에 깊은 영 향을 받고 ‘관계’라는 주제로 작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열 심히 관계를 맺어 가면서 일단 살아가 보자.’ 이렇게 살아 갈 구실을 찾아보기로 하고 그 주제를 표현할 매개로 못 을 활용했습니다. 그렇게 못에 빠져있던 시절, 친구가 인생 처음 사게 된 작은 한옥을 방문하게 되었지요. 못을 생필품들 걸개로 삼고, 못에 전선줄들을 걸어 졸대를 대신하는 등, 온갖 기 능들을 못으로 대체하여 사방이 못들로 꾸며진 그 집은 내 평생 못으로 씨름하면서도 생각지 못한 발상들이 생활 로 숙성된 절실함으로 자리잡고 있는 곳..

세대간 소통 2024.08.13

우리 모두는 서로에게 은인입니다 | 이계철 라파엘 신부님(주교좌 기도 사제)

우리 모두는 서로에게 은인입니다                                                                            이계철 라파엘 신부님(주교좌 기도 사제)  저는 작년에, 부족했던 공부를 더 하고 여러 성지를 순례할 수 있는 은총의 시간을 허락받았습니다. 그중에 한 주간을 베네딕토 성인께서 수도생활을 시작하셨던 거룩한 동굴 수도원이 있는 수비아코에서 보냈습니다. 베네딕토 성인께서는 3년 동안 수비아코 산 속의 동굴에 서 은수생활을 하던 중에 하느님을 만났고 악마와 싸웠 으며, 이후부터 악에 현혹되지 않게 되셨다고 합니다. 저는 수비아코의 중심가에 숙소를 정하고 매일 산길 을 걸어서 거룩한 동굴 수도원에 가서 기도드렸습니다. 그런데 배고픈 순례자였던 저에..

사제의 공간 2024.08.11

말씀의 이삭 | 모태 신자의 필수(?) 코스, 냉담

모태 신자의 필수(?) 코스, 냉담  저는 ‘젬마’라는 세례명을 호적에도 등록해서 본명으 로 삼고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풋풋하고 창창하던 대학 교 1학년 시절, 일단 좀 묻어가자는 마음으로 첫 단체 소 개팅 이벤트에 제 인생 처음 ‘한○○’ 가명 사용을 시도 했는데…. 아뿔사! 단체 소개팅에서 가명을 쓰고자 했다 면 친구들 모두에게 제 가명을 공유하고 숙지시켜야 했 건만, 저 혼자만 가명을 파트너에게 발설했으니! 단체 소 개팅으로 함께하는 친구들은 저를 당연히 ‘한젬마’로 불 러대는 바람에, 상대를 어리둥절하게 만든 코미디 사태 가 발생! 그렇게 용감하게 가명을 질러댔다가 소개팅을 망 치고 그냥 줄행랑을 쳐버렸던 인생 최대의 실수 이후, 저 는 그나마의 가명 사용도 철회하였습니다. 평범하게 살기 는 애..

세대간 소통 2024.08.06

망각과 살아있는 빵 | 윤정한 바오로 신부님(제17 강서지구장)

망각과 살아있는 빵                                                      윤정한 바오로 신부님(제17 강서지구장)  오늘 제1독서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은 말합니다. “우리가 고기 냄비 곁에 앉아 빵을 배불리 먹던 그때, 이집트 땅에 서 주님의 손에 죽었더라면! 그런데 당신들은 이 무리를 모 조리 굶겨 죽이려고, 우리를 이 광야로 끌고 왔소?”(탈출 16,3) 노예 생활을 하면서 먹었던 음식과 고기에 대한 그리 움은 광야에서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총과 자비를 기 억하지 못하게 합니다. 광야의 가혹한 환경이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얼마나 큰일을 해 주셨는지 잊게 만 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고달픈 삶을 살면서 하느 님께 불평과 불만을 쏟아냅..

사제의 공간 2024.08.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