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교구 94

변모, 말이 없는 말, 자랑이 없는 참빛 | 이근상 시몬 신부님(예수회)

변모, 말이 없는 말, 자랑이 없는 참빛 이근상 시몬 신부님(예수회) 주님의 변모, ‘새하얀 빛’이 우리를 사로잡습니다. 그러 나 그 빛은 당신의 거룩함을 드러내는 힘자랑도, 홀로 우 뚝 선 마법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 변모 사건의 위치는 언제나 당혹스런 수난 예고에 이어진 뒷자리였습 니다. 변모는 이를테면 밤을 낮으로 뒤바꾸는 강렬한 태 양이 아니라 ‘수난’이라는 밤길에 내민 손, 흔들리는 믿음 을 붙잡는 따뜻한 빛이었습니다. 십자가와 죽음, 메시아 와 양립할 수 없는 실패의 예고로 제자들이 길을 잃었을 때, 변모는 빛으로 함께하리라는 약속이었습니다. 저도 길을 잃어 빛이 필요한 날이 있었습니다. 아버지 의 죽음이었습니다. 그해 정초 아침, 안부차 드린 전화 너 머 아버지의 목소리가 이상하게..

사제의 공간 2024.02.25

청소년특집 | 모든 청소년들은 자신들의 삶을 실현하고 싶어합니다

모든 청소년들은 자신들의 삶을 실현하고 싶어합니다 재훈(가명)이는 근처의 00센터에서 의뢰받았습니다. 맨 처음 그를 담당했던 상담 선생님은 무엇 때문인지 ‘무섭다’며 상담을 포기하셨답니다. 처음 만났을 때 헤 어밴드로 올백하고 마스크를 쓰고 있던 재훈이는 눈 빛이 강렬하며 카리스마가 있고 아주 잘생긴 친구였 습니다. 전에 만나신 선생님은 무엇이 무서우셨을까 생각하면서 저도 조금은 조심스레 만났는데요, “사람 들을 죽이거나 가해한 이들의 마음이 이해된다. 오히 려 피해자들보다 가해자들의 마음이 내 마음과 더 비 슷한 것 같다.”라고 하거나 묻는 말에 간혹 눈을 감고 한참을 생각하다가 말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젊은 여 자 선생님의 경우, 이런 친구를 만나면 섬뜩하고 무서 울 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하지만 이..

세대간 소통 2024.02.13

말씀의 이삭 | 작은 변화

작은 변화 저는 가끔 노래의 멜로디는 기억하는데 가사가 통 기 억이 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면 그냥 제멋대로 가사를 바꾸어 노래 부르곤 합니다. “안녕 귀여운 내 친구 야 멀리 뱃고동이 울리면 네가 안아 주렴. 아무도 모르게 혼자서 멀리 멀리 왔다고.” 가수 김창완님의 노래 가사입 니다. 얼핏 보면 맞는 것 같지만 원래의 가사와는 많이 다 릅니다. “아무도 모르게 모두가 잠든 밤에 혼자서, 울면서 멀리 멀리 갔다고.”로 표현된 원래의 가사는 슬픈 이별과 떠나 감을 이야기하지만, 몇 개의 바뀐 단어 때문에 따듯한 포 옹으로, 멀리서 온 친구를 맞이하는 전혀 다른 이야기로 변합니다. 제가 오늘 여러분들과 함께할 이야기는 이렇게 무심코 지나칠 수 있는 작은 변화에 관한 것입니다. 저는 글씨를 종이에..

세대간 소통 2024.02.06

주저앉아 있지 말고 허리를 동여매고 일어납시다! | 신희준루도비코 신부님(양천성당 주임신부 겸 제18양천지구장)

주저앉아 있지 말고 허리를 동여매고 일어납시다! 신희준루도비코 신부님(양천성당 주임신부 겸 제18양천지구장) “너는 다 계획이 있구나.”라는 영화 의 명대사 혹 시 기억하시나요? 이 대사를 떠올릴 때마다 참 모든 게 계획 대로 순조롭게 되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아쉬운 생각이 듭니 다. 우리 삶에는 언제나 생각지 못한 일들이 일어나기 마련 이니까요. 누가 알았겠습니까? 지난 몇 년간 코로나 때문에 미사가 중단되고 성당 문이 닫힐 줄을 말이죠? 좋아하는 부 모 형제와 자녀들을 몇 년이나 만나지 못하고, 사랑하는 이들 의 임종을 지키지 못하게 될 줄을요. 또 사랑하는 이들이 투 병 중에 있는데도 찾아가지 못하게 될 줄 누가 미리 알았겠 습니까? 그리고 혼자 있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오는 외로움 과 무력감에서 벗..

사제의 공간 2024.02.01

말씀의 이삭 | 삶의 나침반

삶의 나침반 저는 부모님께 아낌없는 사랑을 받고 자랐습니다. 어 린 시절, 그렇게 유복한 집안은 아니었으나 형과 제가 받 은 어머니와 아버지의 사랑만큼은 어느 부유한 가정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사랑과 애정의 중심에 하느님의 말씀이 있었다는 걸, 삶을 살아오면서 온몸으로 느끼고 있습니다. 어머니 는 제가 어렸을 때부터 꾸준히 하느님을 찾아 기도를 올 리셨는데, 그런 어머니를 보며 자란 저의 삶에도 어머니 의 삶이 자연스럽게 스며들었습니다. 어머니의 손에 이끌 려 자연스럽게 하느님을 만났기에, 제가 즐겁거나 행복할 때, 힘들거나 슬플 때 성당을 찾는 데는 어머니, 당신의 영향이 컸습니다. 하느님과 항상 가까우셨던 어머니는 자식들이 바르게 자랄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시면서, 스스로..

세대간 소통 2024.01.30

들리는 것과 들을 소리 | 류지인야고보 신부님(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들리는 것과 들을 소리 류지인야고보 신부님(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새날이 시작됨을 알리는 새벽 수도원 종소리가 청명하 게 울려퍼집니다. 그러나 오늘은 시간을 꽤나 지체하고 말았습니다. 이제 조금만 더 늑장을 부린다면 아침 기도 시간에 늦을 것이 분명합니다. 얼굴의 물기를 닦을 시간 도 없이 허겁지겁 성당으로 향했습니다. 가까스로 지각은 면했으나 헐떡이는 숨소리가 다른 형제들의 잠심을 깨뜨 리고, 누르지 못한 머리의 까치집은 기도 시간 내내 저의 분심이 되고 말았습니다. 종소리에 담긴 부르심에 귀를 닫아버린 결과입니다. 귀는 언제나 열려 있기에 구조적으 로 소리를 거를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듣는 소리와 흘 려버리는 소리가 공존하는 현실을 보면 우리 영혼에는 모 름지기 각자의 귀마개를 두고 있는 모양입니..

사제의 공간 2024.01.29

말씀의 이삭 | 사랑받고, 사랑할 수 있음이 감사한 매일

사랑받고, 사랑할 수 있음이 감사한 매일 저는 많은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제가 큰 사랑을 받 고 있다는 걸 느낍니다. 가족은 물론, 촬영 현장에서 제작진 과 스태프, 동료 배우 등 정말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하며 이 를 체감하고 있습니다. 시상식에서는 저를 사랑하고 환호 해 주시는 수만 명과 눈으로 교감합니다. 또 직접 마주하지 는 못하지만, 텔레비전, 영화관 스크린, 휴대전화 화면으로 함께해 주시는 많은 분들의 열정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 친한 동료인 나영석 프로듀서님과 유재석 씨가 각각 진행하는 방송에 출연한 적이 있습니다. 특별한 주제 없이, 대본도 없이, 꾸밈없이 편안한 모습으로 한 시간도 넘 게 수다를 떨고 돌아왔습니다. 두 분의 힘 덕분인지, 방송 후 대중의 높은 관심을 여실히 느..

세대간 소통 2024.01.23

말씀의 이삭 | 일상의 행복

일상의 행복 최근 기자분들과 제 ‘일상’에 대해 말할 기회가 있었습 니다. 한 번도 의식적으로 생각해 본 적 없던 저의 하루가 어떠한지 그려보려고, 전날과 그 전날, 또 그 전전날을 떠 올려 봤습니다. 저는 일주일에 네 번은 같은 시간에 운동 하고, 집안일을 하며, 촬영장을 오갑니다. 촬영장이 특별 해 보일 수 있겠지만, 배우인 제가 현장에 가는 건 회사원 이 사무실에 가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요? 몇 년 사이 제 일상에 변화가 조금 있긴 합니다. 4년 전 부터 강아지 두 마리를 키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저 는 강아지는 마당에서 키워야 한다고 생각하고, 침대 위 에 강아지들이 있는 게 이해가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는 데, 바뀌었습니다. 반려동물들을 대하는 게 어떤 마음인 지 너무나 잘 알게 됐습니..

세대간 소통 2024.01.16

청소년특집 | 정말로 어른들이 생각하듯 청소년들은 신앙에 관심이 없을까요?

정말로 어른들이 생각하듯 청소년들은 신앙에 관심이 없을까요? 첫 본당 보좌신부 시절, 70여명의 중고등부 친구들 과 겨울 피정을 하던 중에 주일학교 학생들을 대상으 로 설문조사를 해서 가장 많은 수의 답변순으로 1위 부터 5위를 정하고, 그 중 1위와 2위를 맞추는 프로그 램을 진행했습니다. 여러 질문 중 기억에 남는 질문은 ‘나는 언제 하느님을 체험하는가?’였습니다. 이에 대한 답변은 둘 다 의외였는데, 2위는 ‘성체를 모실 때’였습 니다. 1위는 더 놀라웠습니다. 바로 ‘힘들고 고통스러 운 시간을 잘 이겨냈을 때’였습니다. 그리고 그날 밤, 조별로 기도와 나눔을 하는데 많은 친구가 가정에서 겪는 부모님과의 갈등들, 어린 시절 상처들, 현재 고 민을 조원들과 나누고, 눈물을 흘리며 성체 앞에서 기 도하..

세대간 소통 2024.01.13

하느님을 사랑하는 방법 : 자연법 | 박종우 야고보 신부님(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윤리신학 교수)

하느님을 사랑하는 방법 : 자연법 박종우 야고보 신부님(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윤리신학 교수) 본당에 나가 특강을 하다 보면 신자분들께 “신 부님, 이것은 죄인가요, 죄가 아닌가요?”라는 질 문을 받게 됩니다. 이러한 질문을 받게 되면 저는 마태오복음 19장 16절의 부자 청년의 질문이 떠 오릅니다.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이는 모든 신앙인 이 품는 근본적인 질문입니다. 우리는 윤리적 선 이 우리의 삶을 완성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며 어 떻게 그것을 실천해야 할지 궁금해합니다. 하지만 다소 의아할 때도 있습니다. 그리스도교에서 이야 기하는 윤리는 때로는 엄격해 보이며 세상의 흐름 과 동떨어져 있는 듯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종종 교회의 윤리적 가르침에..

사제의 공간 2024.01.13

말씀의 이삭 | 간절한 기도의 힘

간절한 기도의 힘 유난히도 추웠던 겨울 어느 날, 꼭 잡은 할머니의 손은 참 따뜻했습니다. 몇 살 때였는지, 어떤 옷을 입고 있었는 지, 그날 눈이 내렸는지는 기억이 잘 나진 않지만, 추위를 녹인 그 온기만큼은 또렷하게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할머니 허리에 닿을락 말락 한 키의 아이 눈에 비친 동 네 성당은 무척이나 크고 높았습니다. 무언가 강렬한 기운 에 압도된 소년은 별생각 없이 어머니를 따라 눈을 감은 뒤 두 손을 모았습니다. 그렇게 아주 자연스럽게 하느님과 만 났고, 주일마다 가는 성당은 일상의 일부분이 되었습니다. 얼마 전 스트리밍 된 영화 공개를 앞두고서도 성당을 찾아 하느님께 마음속 이야기를 털어놓았습니다. 비록 예 전처럼 그곳에서 자주 미사를 드리지는 못하지만, 기도 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

세대간 소통 2024.01.09

말씀의 이삭 | 가진 것을 다 팔아 하늘에 보화를 쌓은 사람

가진 것을 다 팔아 하늘에 보화를 쌓은 사람 아버지가 선종하시고 나서 깨닫게 된 것이 부친 토마스 아 퀴나스 님은 가진 것을 다 팔아 하느님 나라를 사려했던 분이 라는 사실입니다. 저희 집안은 전통적인 구교 집안도 아닌데 큰 아이는 수녀, 둘째 아이는 수사신부가 됐습니다. 막내는 약 10년을 사제 혹은 수도자 성소를 위해 최선을 다했던 아 이였습니다. 하지만 자기 계획과는 달리 결혼 성소를 이뤄 예 쁜 딸을 둘이나 키우는 행운을 얻었습니다. 아무리 하느님께 서 무상으로 주시는 분이라고 하지만 저는 사람의 노력이 아 주 조금이라도 들어가야 한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 은 몰라도 제가 수도자가 된 것은 좀 맥락이 안 잡히는 일이 었습니다. 제가 노력한 건 조금도 없으니 아버지가 벌인 일 에 하느님께서..

세대간 소통 2024.01.02

당신은 나에게 소중한 존재입니다 | 최우주 필립보 신부님(대신학교 지도신부)

당신은 나에게 소중한 존재입니다 최우주 필립보 신부님(대신학교 지도신부) 올해의 마지막인 오늘, 지난 한 해를 돌이켜봅니다. 다 사다난(多事多難)했던 시간이었지만 우리는 모두 자기 혼자 만의 힘으로 살지 않고, 주위의 도움과 사랑으로 살아왔음 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도 바오로의 콜로새서 말씀처럼 늘 “감사하는 사람”(제2독서)이 되었으면 좋겠습 니다. 영어로 헤어질 때 건네는 인사말인 ‘굿바이’(Good-bye)의 본래 의미는 “하느님께서 너와 함께 하신다.”(God be with you) 뜻을 담고 있습니다. 삶의 고비마다, 이해하기 어려운 고통 에 처할 때라도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보았다고 (루카 2,30) 고백할 수 있을만큼, 위로받을 때를 기다릴 수 있는 인내와 희망이 우리 안에..

사제의 공간 2023.12.31

말씀의 이삭 | 너는 혼자가 아니야

너는 혼자가 아니야 청년들의 고독사를 다룬 뉴스들이 종종 들려옵니다. 옛 날엔 막연히 ‘딱한 일이네. 얼마나 외로웠을까?’ 하며 알지 못하는 그 누군가를 위해 짧은 화살기도를 올렸습니다. 하 지만 자립준비청년들과 만나는 사목을 하면서부터는 그런 소식이 들려오면 심장이 덜컥 내려앉습니다. 퇴소한 청년 중 누군가가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근심이 몰려옵니다. 작년 초에 연락이 두절됐다가 5월의 끝자락에 홀로 주 검으로 발견된 요셉이 설마 설마 했던 근심을 현실로 대면 하게 했던 청년이었습니다. 키워주신 수녀님에게 찾아오 겠다는 전화만 해놓고 갑자기 연락이 두절된 터라 수녀님 은 너무 걱정된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요셉과 친분이 있었 던 요셉의 후배와 함께 예전에 요셉이 자기 직장이라고 알 려줬던 충남 홍성의 축산 ..

세대간 소통 2023.1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