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과 춤 그리고 포옹
이한석 사도요한 신부님(가톨릭대학교 종교학과)
저는 서울 외곽에 살기에 명동성당 가는 길이 기쁩니다. 삶을 누리는 화사한 이들 틈에서 걷다 보면 저도 덩달아 마 음이 부풉니다. 그런데 가끔 거리의 음악 소리를 뚫고 들려 오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웃음을 머금고 걷는 이들 사이에 서 그들의 환희를 책망하듯, 심판과 지옥을 부르짖는 외침 입니다. 제가 아는 하느님은 그런 분이 아니신데 그들이 외 치는 익숙한 단어들이 낯설게 느껴집니다. 그분은 거리를 걷는 평범한 이들의 기쁨에 함께하시고, 이들의 실수에 아 파하시며, 화려함 뒤에 숨은 공허함도 안아주시는 분일 텐 데 지옥을 외치는 목소리 앞에서 저는 오히려 외로워집니 다. 그 외침이 흥겨운 음악 소리를 덮듯이, 우리가 아는 좋 으신 하느님도 덮어버릴까 봐 초조해집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약속하십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 이 아름다운 약속 앞에서 세례받은 우리의 사명인 선교를 다 시 생각해 봅니다. 나보다도 더 ‘나와’ 가까이 계신다는 예 수님의 말씀 앞에서 어떤 것이 선교인지 떠올려 봅니다. 기쁨의 순간이든 분노의 순간이든 고통과 절망, 환희와 반성이 교차하는 모든 시간에 ‘언제나’ 함께 계시겠다는 약속 앞에 비추어보며 말이지요. 그리고 명동 거리에서 들은 그 외침이 우리가 할 선교와는 다르다는 것을 다시 깨닫습니다.
선교는 오히려 사람들을 감동하게 하는 아름다운 음악 과 비슷할 겁니다. 또 그 음악에 맞춰 추는 춤에 가깝습니 다. 좋은 음악에 어우러진 아름다운 춤이 우리가 할 선교 를 가장 잘 설명해 줍니다. 또한 선교는 누군가를 끌어안 는 포옹과 비슷합니다. 그가 내 품에 안기기까지 걸어온 길과 흘린 땀, 마음속에 자리한 아픔을 그대로 인정하는 끌어안음과 닮아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보여주 신 하느님께서 그런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윽박지르기보 다 물러나심으로, 승리의 함성보다는 새벽의 침묵으로 부 활을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교 주일을 맞아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우리 교 구의 교세가 아닐 겁니다. 교우들 숫자가 늘어나고 줄어드 는 것과 하느님 덕분에 행복한 이들의 행복감은 관련이 없 어 보입니다. 하느님은 당신과 일치한 단 한 명의 사람으로 도 교회와 세상을 바꾸실 분이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그러므로 선교를 위해 살펴야 하는 것은 나의 사랑입 니다. 하느님의 음성에 맞춰 추는 나의 춤을 비춰봐야 합 니다. 내 이웃이 나와 함께 노래를 부르고 있다면, 나의 귀에 들리는 그 좋은 음악이 그들에게도 들린다는 증거일 겁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가 추는 춤에 함께한다면, 그 들이 우리의 춤에 감명받았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느님으 로 인해 기쁘다면, 그 기쁨은 감출 수 없습니다. 그 아름 다운 음악은 나를 넘어 이웃과 낯선 이를 채우고 세상을 하느님의 나라로 바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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