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제의 공간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松竹/김철이 2020. 11. 9. 11:35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정호 빈첸시오 신부님(부산교구 괴정성당 주임) 

 

 묵상 듣기 : youtu.be/nRn4MNRxVL0

 

 

우리에게 성전은 어떤 의미입니까? 예루살렘 성전의 정화 사건은 예수님의 분노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지만 동시에 성전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게 합니다. 성전에는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이들이 있었고 그를 위해 돈을 바꿔주는 환전상들도 있었습니다. 

 

곧 성전이 사람들에게 경제의 한 부분이 되었다는 것이고, 그것을 통해 사람들은 좀 더 편리하게 성전의 의무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냥 시장이 아니라 성전에 드려질 봉헌물들이니 그것에 부정이 있으리라 생각하기 어렵고 멀리 집에서 끌고 온 동물들보다 더 좋은 것들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나 이런 부분도 예수님의 분노를 피해가지는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모든 것을 '장사하는 집'으로 규정하십니다. 우리가 편리하기 위해 그렇게 시작된 것이 아무리 좋아보이고 그것으로 성전을 아름답게 꾸미고 거기에 생활하는 이들을 돕는다 하더라도 그것이 근본을 잊어버리게 만드는 이유라면 그것은 그저 누군가의 '장사'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성전은 어떨까요? 하느님을 만나는 곳이라 말하기에 여전히 우리는 많은 것들을 만들어 내었고 그것이 때로 초점을 잃게 만드는 경우도 많습니다. 사람들은 성전에 들리며 하느님 전에 이미 많은 관계와 이야기에 휩싸이고 재물에 대한 부분도 떨쳐버릴 수 없는 이유가 되어 사람들을 감싸고 있습니다. 

 

우리는 장사하는 집이 아니라 말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래야 그리스도로부터 시작된 이 집의 의미가 더 선명할텐데... 어쩔 수 없다를 넘어 좀 더 적극적으로 이 부분으로 사람들에게 좋음을 강조하는 일까지 능력으로 비춰지는 모습들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사실이 또 그러하니 무엇을 능력으로 이야기할 수 있을지도 걱정입니다. 

 

 

주님께 봉헌된 커다란 성전을 머리 속에 그리며 아름다운 성전 안에서 또 미사를 드릴 겁니다. 그리고 중심에서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분은 어떤 이야기를 하실까요? 우리가 그분의 미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과 왠지 자신 없는 마음 사이에 있는 느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