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제의 공간

용서해야 용서받는다.|겸손기도 마진우 요셉 신부님

松竹/김철이 2020. 11. 7. 12:23

용서해야 용서받는다.

                                          겸손기도 마진우 요셉 신부님  

 

 

죄와 그 해소라고 볼 수 있는 용서에 대한 메커니즘이 순수하게 '물질적'인 것이라면 좋을 것 같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100만원을 빚지면 100만원을 갚으면 그걸로 해방되는 식이라면 정확하고 딱 맞아 떨어지는 무언가가 되겠지요. 우리는 이미 일상적으로 그런 물질적인 거래의 메커니즘을 살아갑니다.

 

죄와 용서는 그런 물질적인 거래와는 다릅니다. 왜냐하면 순수하게 물질적인 손해만을 다루는 영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죄는 우리의 영혼과 그리고 그 영혼의 의지와 관계되는 것이고 따라서 또다른 '의지'로서 비로소 해소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흔히 우리는 누군가 나에게 '잘못'을 하고 그 잘못을 철두철미하게 뉘우치는 모습을 나에게 드러내야지만 '용서'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앞서 말한 물질적 사고에 익숙해져 있는 우리가 흔히 하는 착각입니다. 그 사람은 죄를 지속적으로 이어갈 수 있고 뉘우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그를 용서하는가 마는가의 문제는 그와 연계된 문제가 아니라 나와 하느님과 연계된 문제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핵심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용서해야 우리도 하느님으로부터 용서받는다."

 

용서를 하고 하지 않는 것이 물리적인 거래가 아니라 영혼의 작용이라고 앞서 말했습니다. , 용서는 조건을 채워서 자동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저울에 무게를 달아서 그 무게보다 더 무거운 것을 실으면 저울이 움직이는 식이 절대로 아니라는 말입니다.

 

용서는 그렇게 하겠다는 '의지'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나에게 잘못한 이를 우리는 용서하도록 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상대가 완전히 뉘우쳤고 그것을 철두철미하게 드러내서가 아니라 하느님 앞에 부족한 한 인간으로서 하느님의 자비를 갈구하는 우리가 하느님의 영원한 나라에 받아들여지고자 한다면 기꺼이 우리에게 잘못한 이들을 용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거듭 말하지만 용서는 의지의 작용입니다. 용서하지 않겠다는 것은 곧 여전히 그를 미워하고 증오하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런 마음을 지닌 사람이 하늘 나라에 들어갈 리가 만무합니다. 즉 우리는 용서하지 못한다고 선언하면서 다른 결과도 받아들이겠다고 결심하는 것입니다. '나는 하늘나라 따위는 필요없다'고 선언하는 것이지요.

 

이렇게 물을 수 있습니다.

"상대가 뉘우치지 않는데 내가 용서를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상대의 내적 상태는 최종적으로 그와 하느님의 관계가 됩니다. 만일 그 상대가 진정으로 잘못이 있고 악을 저질렀는데 최종적으로 진실한 회개에 이르지 못한다면 결국 그는 하느님으로부터 응분의 형벌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뉘우친다면 그도 하느님의 자녀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내면에서 일어나게 될 일이 무엇인지 하느님은 그에 대해서 어떤 결과를 선언하실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심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측에서 먼저 용서해야 하는 것이지요.

 

용서를 한다는 것은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그를 끌어안고 그가 계속 나를 찌르는데 그대로 방치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용서는 하나의 시작점일 뿐입니다. 마치 우리가 세례를 받았다고 그 즉시 성인이 되는 것은 아닌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해서 하느님의 자녀로 들어서고 그 세례를 완성시켜 나아가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용서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용서를 처음으로 결심하긴 하지만 그 상대가 여전히 자신의 잘못을 지속할 것인가 아닌가에 따라서 우리의 행동도 달라질 수 밖에 없습니다.

 

필요하면 그를 따뜻하게 맞아줄 수도 있고, 또 필요에 따라서 그를 무관심하게 대할 수도 있습니다. 길을 가다가 자기가 욕구하는 장난감을 사달라고 악을 쓰는 아이를 모른척 지나가는 엄마의 마음이 악한 마음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용서를 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용서의 구체적 현실은 저마다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다시 처음의 강조점으로 돌아와서 우리는 '용서해야' 합니다. 용서는 조건이 채워져서 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용서 하겠다고 결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용서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도 하느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