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자기가 믿는 하느님처럼 이웃을 만난다] 성 요한 사도 축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2024 12 28
(클릭):https://www.youtube.com/watch?v=FVyCHBdlqQk
2024년 성 요한 사도 축일 – 사람은 자기가 믿는 하느님처럼 이웃을 만난다
어제 외국에 있는 큰형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형은 오랜 냉담 끝에 성당에 다시 나가기로 했는데 고해 때 그 사제가 또 냉담할 걸 뭐 하러 고해하러 왔느냐고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어르신들에게 하는 행동도 마치 깡패 같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더 죄짓지 않기 위해 다시 냉담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지금은 본당신부가 바뀌어서 귀국하면 다시 나가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하느님은 자비이시고 사랑인데, 왜 어떤 신앙인들은 그런 모습이 아니라 무자비하고 폭력적인 모습을 보일까요? 한 마디로 실제로는 하느님을 만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사도 성 요한의 축일입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가장 친밀하게 만났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주님, 주님 한다고 다 구원받는 것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한 가지 알아두어야 할 것은 누구든 내가 창조자를 만나는 방식으로 이웃을 만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사람을 만나면서 영향을 주고 싶어 합니다. 그래야 자신이 가치 있는 존재라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내가 타인에게 영향을 주는 방식은 내가 영향을 받아 성장할 때와 같습니다. 사람은 본 것만을 할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두 발로 걷는 존재를 하나도 보지 못한 아기는 절대 두 발로 걷고 싶은 마음을 갖지 못합니다. 그래서 짐승들에게 키워진 아이들은 하나같이 그것들을 흉내 내지 두 발로 걷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본 것을 따라 하는 것이 가장 쉽습니다.
자신이 사랑이 없는 부모에게 길러졌고, 그래서 항상 불안하고 힘들었다고 해서 자녀를 키울 때 그것과 다르게 키울 수 없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본 것을 따라 하는 것이 가장 쉽습니다. 그래서 엄한 부모에게 자란 자녀는 엄한 부모가 될 가능성이 큽니다. 내가 불안한 감정과 억압된 감정을 가지면서도 지금처럼 자랐기에 다른 사람들도 성장하기 위해서 그 정도는 감수해야 한다고 믿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이 영향을 받을 때 느꼈던 감정을 타인에게도 미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로 이웃에게 선한 영향력을 미치고자 한다면 선한 창조자를 만나야 합니다. 영국에서 시작된 퀘이커교가 있습니다. 이단입니다. 세례도 없고 성체성사도 없고 성직자도 없습니다. 그런 종교적 형식 없이도 자기 마음 안에서 하느님의 빛을 발견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가슴 깊은 곳에서 하느님 사랑을 체험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만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체험한 하느님은 사랑입니다. 이들은 세상에 많은 공헌을 하였습니다.
존 울먼(John Woolman)과 루크레샤 모트(Lucretia Mott)와 같은 인물은 노예제 폐지를 주장한 주요 인물들이었습니다. 자신 안에서 만난 하느님은 자유였기 때문입니다. 또 미국친우봉사회(American Friends Service Committee)와 같은 여러 단체를 설립했는데, 이 단체는 1947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습니다. 이들이 만난 하느님은 평화였습니다.
엘리자베스 프라이(Elizabeth Fry)는 교도소 개혁을 한 여성입니다. 영국 지폐에까지 엘리자베스의 얼굴이 등장합니다. 1800년대 여성이 인권운동을 하는 것은 일반적이지 못했습니다. 초기의 엘리자베스는 사교 모임을 좋아하고 외적인 삶에 더 많은 관심을 두었으며, 자신이 가진 부와 특권을 어떻게 다른 사람들과 나눌지에 대한 뚜렷한 의식이 없었습니다.
이런 삶의 방식은 퀘이커 설교자인 윌리엄 세이버리를 만난 후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1798년, 세이버리의 설교를 들은 엘리자베스는 깊은 영적 각성을 경험합니다. 엘리자베스는 이 만남 이후 일기장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나는 하느님이 계시며, 그분은 그분의 피조물을 사랑하신다는 것과 우리가 진실하게 그분을 찾으면 그분을 발견하고 느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 체험은 엘리자베스를 완전히 변화시켰습니다. 그녀는 하느님의 사랑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고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는 삶을 살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1813년, 엘리자베스는 처음으로 런던의 뉴게이트 감옥을 방문했는데, 그곳에서 본 장면은 그녀에게 강한 충격을 주었습니다. 감옥은 과밀하고 비위생적이었으며, 여성과 아이들은 비참한 환경에서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죄수들은 굶주림과 질병에 시달리며, 사회는 그들을 완전히 잊은 듯했습니다.
그녀는 단순한 동정을 넘어, 이들이 하느님께 사랑받는 존재임을 깨달았고, 그들의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행동에 나섰습니다. 그녀는 여성과 아이들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을 설립하고, 기본적인 위생과 의류를 제공하며, 여성 죄수들에게 재봉과 뜨개질 같은 기술을 가르쳐 출소 후 삶을 준비하도록 도왔습니다. 또한 죄수들과 함께 성경을 읽고 영적 지침을 제공하며, 그들에게 희망을 주고자 했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썼습니다.
“우리는 위대한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오직 작은 일을 큰 사랑으로, 그분의 뜻에 순종하여 할 수 있을 뿐입니다.”
엘리자베스는 의회 앞에서 감옥 개혁을 주장하며, 영국 전역의 감옥 환경 개선을 목표로 한 1823년 감옥법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는 당시 여성으로서 매우 대담하고 특별한 행동이었습니다.
이단도 진짜 하느님을 만나면 세상 사람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바뀌고 자유롭게 하고 평화롭게 하고 사랑을 해 줍니다. 만약 정상 종교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지 못한다면 이들보다 못한 존재가 됩니다.
그렇다면 개인적 체험이 중요하고 세례와 성체성사, 고해성사 등은 다 필요 없다는 말일까요? 그들은 우리 안에 뿌려진 씨앗을 발견하는 사람들입니다. 거의 발견하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신앙 안에서 많은 도움을 받아 하느님을 만나기 더 쉽습니다. 씨앗을 발견하기는 어렵지만, 열매를 찾기는 쉽습니다.
장 발장은 자신에게 촛대까지 내어주는 주교의 사랑에 감동하여 억울한 도둑에서 선하고 정의로운 일을 하는 존재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를 쫓던 경관은 여전히 도둑은 착해질 수 없다고 믿었고 장 발장에게서 도움을 받자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살합니다. 종교는 하느님을 만나게 해 주는 도구이지 그 자체가 구원을 위한 목적이 아닙니다. 가장 하느님을 만나기 좋은 성체성사와 고해성사를 지닌 가톨릭 신자라도 예식에 치중하여 진심으로 가슴에서 하느님을 만나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타인에게 안 좋은 영향만 끼치고 맙니다. 반면 하느님을 사랑으로 만난 사람은 오늘 요한처럼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여러분에게도 선포합니다. 여러분도 우리와 친교를 나누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의 친교는 아버지와 또 그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나누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쁨이 충만해지도록 이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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