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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부작 연작 수필 | 사계절 추억의 놀이 문화를 찾아서_제3부 굴렁쇠 구르던 길에

松竹/김철이 2023. 11. 8. 12:04

4부작 연작 수필 | 사계절 추억의 놀이 문화를 찾아서

 

제3부 굴렁쇠 구르던 길에

 

                                                                                               김철이

 

 

 

옛날 설화 속에 등장하는 한 위인이 죽어 저승엘 갔더니 염라대왕이 말하기를

“너는 이승에서 살면서 추억은 얼마나 쌓았느냐?”고 묻더란다. 가난하고 궁핍한 세상사 하루하루 사느라 가슴에 찌든 상처만 그득할 뿐 아름답게 여겨지는 추억거리가 별로 없었던 위인이 대답하기를 망설이고 있으니, 눈치를 챈 염라대왕이

“처지를 탓하는 건 핑계일 뿐 추억 쌓기에 실패한 너는 영혼으로 사는 우리 저승에서도 아무런 쓸모가 없으니, 이승으로 되돌아가서 충분히 추억 쌓기를 한 후 다시 온다면 받아 주마”

는 약속을 했다는 것인데 저승의 영혼들 증언에 의하면 그 후 그 위인이 저승엘 들어오는 걸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비록 설화 속 이야기이지만, 영혼 사회에서도 그만큼 중요시한다는 것이고 인간사 추억 쌓기는 빈부의 차이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 가슴이 얼마나 따뜻하고 차냐의 차이일 뿐이지 사계절 추억의 놀이 문화를 찾아서 세 번째 이야기, 추억의 씨앗 쓸어 담으러 떠나 보기로 한다.

 

닭싸움 놀이는 상대와 맞붙을 때는 손을 사용하면 안 되고, 어깨나 머리 또는 몸으로 밀어붙여 싸워야 한다. 상대의 힘에 밀려 주저앉거나 균형을 잃어, 올린 발을 푸는 쪽이 진다. 먼저 기본자세를 취해야 하는데, 보통 한쪽 발을 들어 서 있는 다리의 허벅다리에 가져다 대고 한 손으로 그 발목을 잡는다. 그리고 다른 한 손으로는 들어 올린 다리의 바깥 허벅다리를 잡는다. 여자아이들의 경우에는 발을 뒤로해서 잡기도 하는데…

 

햇살이 잘 드는 양지엔 수다쟁이 참새떼와 개구쟁이 악동들이 저절로 모여드는 법이라 6070 시절 연산2동 철도관사 16호 2, 우리 집 마당은 사시사철 따스한 햇살이 내리쬈던 덕에 동네 악동들의 놀이터로 변해있었다. 놀잇감이 변변치 못했던 시절이고 아무런 도구나 기구가 필요 없었던 터라 모여든 아이들이 손쉽게 할 수 있었던 놀이는 닭싸움 놀이였다. 체급별 씨름도 아닌데 닭싸움 놀이가 있을 때마다 심판을 맡았던 나는 또래와 남자아이, 여자아이로 구분하여 닭싸움시키는 한편 직접 닭싸움 놀이에 참여할 수 없으니 다른 아이들의 놀이에 침체하여 대리만족 남아(男兒)의 호연지기를 길러야 했지만, 추억만은 영혼의 배를 불리기에 충분했었다.

 

성냥개비 놀이는 소년들이 방 안에서 하는 놀이이다. 가위, 바위, 보로 승리한 사람이 먼저 성냥개비 서른 개를 손바닥에 쥐고 일정한 범위 안에 던진다. 이때 서로 겹친 것은 두고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을 다 치운 다음 그중에서 한 개로 겹친 것을 살짝살짝 떼기 시작한다. 이때 옆의 것이나, 혹은 밑의 것을 건드리게 되면 패하는 놀이다. 이렇게 제각기 하여 많이 딴 사람이 승리하는 놀이인데 형과 나는 조금 어린 나이부터 성냥개비 놀이를 시작했었다.

부친으로부터 성냥개비 놀이를 배운 뒤부터 틈만 나면 두 형제가 놀이를 통해 우의를 다져갔는데 부모 된 입장에서 일반적으로 생각하기에 어린 나이에 성냥개비를 만지며 노는 것이 위험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도 되겠지만, 그 시절 모친께선 성냥 통 겉지 붙이는 부업을 하셨는데, 두 아들이 성냥개비 놀이를 할 때마다 성냥이란 생활 도구가 사람들 실생활에 더없이 많은 편리함을 가져다주는 물건이지만, 한순간 부주의로 소홀히 여기면 소중한 우리의 생명과 재산을 통째 앗아갈 수 있는 위험물이라는 경각심을 일깨워 주시며 주의심을 늦추지 않으셨던 덕분에 안전한 성냥개비 놀이로 개구쟁이 시절 넉넉한 추억을 쌓을 수 있었다.

 

소문놀이는 여러 명의 아이가 반으로 패를 나누고 서로 마주 보며 나란히 앉는다. 그리고 양편에서 대장을 한 사람씩 뽑아, 어떤 말을 소문내기로 약속하고 각기 상대편의 첫 아이에게 이야기한다. 소문을 들은 아이는 옆 아이에게 귓속말로 옮기며 끝 아이에게까지 전한다. 이 과정이 끝나면 소문이 여러 아이를 거치는 사이에 바로 옮겨졌는지를 확인하여 바로 전한 패가 이기게 된다. 소문은 똑바로 전해질 듯싶으나 때로는 생각지도 않던 말이 튀어나와 웃음을 자아내는데 소문놀이는 우리 생활에 크나큰 교훈을 남기는 놀이였다.

 

남의 말하기 쉬운 세상에서 넘으면 세 치밖에 안 되는 혀로 전한 말로 어떤 이는 둘도 없을 영웅이 되지만, 어떤 이는 더없이 큰마음의 상처를 입고 지옥의 나날을 보내곤 한다. 이 놀이는 열한둘 먹은 또래의 아이들이 모여 즐기는 놀이지만, 모친은 중증의 중복장애(지체, 언어)로 발음이 어눌한 차남의 발음 교정을 위해 틈이 보일 때마다 장남을, 소문놀이를 하게끔 유도하셨으며 당신 친히 놀이판에 뛰어들어 소문놀이가 지닌 의미를 깨닫게 해주시지만 나를 놀이의 대장으로 지목하여 듣고 전달할 아이의 귓속에 가장 정확한 발음으로 말의 씨앗을 뿌리게 하여 거부감 하나 없이 자연스레 나의 발음 교정을 시켜주셨다. 아울러 철없는 어린아이라 해도 남의 말은 쉽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가르침도 늘 잊지 않으셨다.

 

공기놀이는 공기라고 불리는 놀잇감을 사용하는 한국의 민속놀이이다. 공기는 놀이에 쓰이는 자그마한 크기의 물체를 부르는 말로 대부분은 작고 비슷한 크기를 지닌 돌이다. 공기놀이는 여자아이들이 치마폭에 한 아름씩 공깃돌을 주워 날아서 즐기던 놀이다. 치마 떨군다고 부모님 걱정 들어가며 놀던 공기놀이는 오래전부터 가르쳐 주는 사람 없어도 한 번쯤 해 보았을 만큼 우리에게 아주 친근한 놀이로서 조선 헌종 때 이규경이 지은 <오주연문장전산고> 서적에 '공기'에 대한 기록이 나오고 있어 그 유래가 상당히 오래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오늘날 공기놀이는 그 기본 형식에 큰 변함은 없지만, 놀이 이름이 지방에 따라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는데, 경상북도에서는 '짜게 받기', 경상남도에서는 '살구', 전라북도에서는 '공기 따먹기', 전라남도에서는 '닷 짝 걸이', 그 밖에 '좌 돌리기' '조개질' '좌질'이라고도 하는데 이 놀이만 마주할 때면 작은 사건에 불과하지만, 유년 시절 우스꽝스러운 실소담(失笑談) 하나가 떠올라 헛웃음이 저절로 배어 나온다.

 

빨갛게 익어갈 한 해의 가을을 신고하려는 고추잠자리 맷돌 노래가 풍요로운 가을을 갈아 골고루 나누어 주려는 듯 마냥 허공에 울려 퍼지는 어느 해 초가을이었는데 예닐곱 되었을 누이동생이 또래 동무를 두서넛 데려와 양지바른 우리 집 앞마당에다 놀이판을 펼쳐 막 공기놀이를 시작하려 할 때였다. 평소에 애살스럽던 한 아이가 어렸던 생각에 갖가지 과실나무가 많이 심겨 있던 우리 집이 부러웠든지 청포도 나무, 단감나무, 살구나무 등을 꼬막손으로 이것저것 만지더니 부친께서 우리 남매들 체력단련과 놀이용으로 철봉 대와 그네를 나란히 설치해 놓으셨는데 공기놀이는 아랑곳없이 갑자기 그네를 뛰고 싶다는 것이었다. 이 광경을 창문으로 내다보던 내가 누이동생을 시켜 그렇게 해주라고 했는데 그 한마디가 돌이킬 수 없는 실언이 될 줄이야 뭔가를 입에다 넣고 오물거리며 한참을 신나게 그네를 뛰던 아이가 잠시 그네 판에 앉아 쉬는 듯싶더니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갑자기 울음보를 터뜨리는 것이 아닌가! 이유를 몰라 한동안 우왕좌왕하다 물으니 좀 전에 감나무 밑에서 감꼭지에 작은 풀쐐기 한 마리가 붙어있는 걸 모른 채 설익은 감 한 톨을 주워 혼자 먹을 꿍꿍이로 동무들 몰래 호주머니에 넣었고 그네를 뛰다 말고 슬그머니 감을 한입 베물었다는 것, 고놈의 쐐기란 놈의 심통이 얼마나 고약했던지 군것질거리 궁했던 시절에 감 한입 베먹으려 했는데 매몰차게 쏘아붙인 것이고 금세 입 주변이 퉁퉁 부어올라 순박한 동심을 서럽게 울렸다는 것이다.

 

아이의 그네를 뛰고 싶은 마음이 아무리 간절해 보였어도 못 본 체할걸…

그랬으면 공기놀이나 하며 놀았을 것이고 쐐기에 쏘이지도 않았을 텐데… 하는 때늦은 후회와 함께 한 소절 실소담(失笑談)도 내 영혼 추억 보따리의 한자리를 차지했을 것이다.

 

굴렁쇠 놀이는 채를 이용하여 굴렁쇠가 넘어지지 않도록 굴린다. 채는 굴렁쇠 모양에 따라 조금씩 다른데 굴렁쇠 놀이의 유래는 옛날 사람들은 곡식이나 술 등을 둥근 통에 넣어 보관하거나 운반하였다. 둥근 통을 운반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기술이 필요하였으며, 기술을 배우는 방법으로 놀이가 유래되었을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처음에는 통에 감았던 나무 테를 이용하다가 쇠테를 사용하였고, 우리나라에 자전거가 들어온 뒤에는 자전거 바퀴나 수레바퀴를 많이 이용하였다. 놀이는 전국적으로 이루어졌으며, 굴렁쇠는 주로 날씨가 따뜻한 봄, 가을철에 많이 굴렸다. 그러나 지금은 여러 가지 놀이기구가 많고 아이들도 움직이기를 싫어하여 그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어졌는데 대부분이 기술직 철도원 자녀들이었던 나의 유년 시절의 악동 동무들은 아버지들이 직접 만들어 준 굴렁쇠를 굴리며 연산2동 철도관사 골목골목 동심을 길렀다.

 

그 시절 연산2동 철도관사 한 동네에 나와 동갑내기가 열일곱 명이었는데 열일곱 명이 동시에 한 줄로 늘어서서 왼손으로 앞사람의 허리춤을 잡은 채 굴리기도 하고, 편을 나누어 일정한 거리를 돌아오는 이어달리기를 하기도 하고, 길바닥에 석필(石筆)로 기차의 선로처럼 선을 길게 그려놓고 선을 바꾸어 가며 굴리기도 하며 “둥글둥글 굴렁쇠야, 굴러, 굴러 어디 가니?”

하는 노래를 함께 부르며 기차놀이를 하였다. 동갑내기 굴렁쇠 기차놀이에 직접 참여할 수 없었던 내겐 역장의 역할을 맡게 해 주었는데 개발이라는 명패를 걸고 그때 그 시절 철도관사는 한 채 두 채 사라져 갔고 그 시절 골목골목 굴렁쇠 구르던 길에 지금은 그 어떤 놀이가 터줏대감 노릇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