松竹♡수필

4부작 연작 수필 | 사계절 추억의 놀이 문화를 찾아서_제4부 추운 겨울 우리는…

松竹/김철이 2023. 12. 30. 12:30

4부작 연작 수필 | 사계절 추억의 놀이 문화를 찾아서

 

제4부 추운 겨울 우리는…

 

                                                                                   김철이

 

 

사람이라면 누구나 걸어야 할 인생길의 출발점에서 한 시절 동심(童心)으로 살아야 한다. 동심은 호발성(好發性)이 어느 시기보다 왕성할 뿐만 아니라 평생 쌓는 추억 양의 80% 이상을 동심의 시기에 체험하는 것인데 동심의 시기에 추억이 덜한 이들은 불행한 사람이라는 속언도 있지만, 이 속언이 속언에 불과하지 않다는 증명을 전하는 필자(筆者)의 동심 행보를 통해 드러내고자 한다.

 

철부지 어린아이들의 노는 시기는, 때와 철을 가리지 않듯이 나의 유년 시절은 놀기 위한 시기였다. 여니 또래의 아이들이 정규 과정을 통해 학업(學業)을 익혀갈 때 나는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부모님의 자율지도(自律指導)와 독학(獨學)으로 인생의 도리와 섭리의 학업을 익혀갔으므로 여니 또래 아이들에 비해 자율적으로 활용할 시간이 많았다. 아울러 몸이 성치 못했던 탓에 놀이와 놀잇감에 남다른 집착을 보였다. 그랬던 덕에 우리나라 전통 놀이에 관심이 많았고 주변 처지 안에서 갖가지 놀이에 참여하기를 노력했다.

 

깡통 차기 놀이는 주로 소년들이 많이 하는 놀이다. 가위바위보로 술래를 정해놓고 술래가 깡통을 밟고 서서 백까지 세며 다른 아이들이 숨을 때까지 기다리다 곳곳에 숨은 아이들을 찾으러 다니는 사이에 곳곳에 숨어 깡통을 발로 밟고 지키던 술래가 자리를 비우기만을 호시탐탐 엿보던 아이들이 “깡통이야!” 하는 벼락같은 큰소리와 더불어 깡통을 멀리 차서 소리가 나도록 하고 다시 숨는다. 깡통은 놓는 자리가 정해져 있어서 숨은 사람이 깡통을 차 놓으면 술래는 다시 제자리에 갖다 놓고 숨은 사람을 찾아야 한다. 숨은 사람을 찾아내어 술래가 먼저 깡통을 밟으면 잡힌 사람이 술래가 되는 놀이인데 깡통 차기는 혹한에 움츠리기 쉬운 겨울철에 따뜻한 아랫목에 머물지 않고 동심을 불태우며 뛰놀 수 있게 하는 적절한 놀이다.

 

나의 유년 시절 연산2동 철도관사 또래 악동들의 겨울철 노는 모습도 칼바람이 무색해 달아날 정도로 더없이 활기찼다. 어떤 아이는 창수네 장독대 뒤에 숨었고 어떤 아이는 경숙네 대문 뒤에 숨었으며 숨은 아이들은 찾는 술래의 발걸음은 한 걸음 한 걸음이 숨죽였다. 그러다 술래가 방심한 틈을 타서 득달같이 달려든 발길에 의해 “깡통이야!”라는 벼락같은 소리에 따라 잡혀있던 아이들 회생의 희열감과 다 찾았다 놓쳤다는 술래의 좌절감이 멀찌감치 달아나곤 했었다. 나는 깡통 차기에 직접 참여하지는 못했지만, 또래 아이들 노는 모습만 보고 있어도 아슬아슬함에 마음이 절로 졸였다.

 

돈치기 놀이는 주로 겨울철 양지바른 곳에서 13∼16세 안팎의 아이들 두 명 이상만 모이면 햇볕이 잘 드는 곳에서 땅바닥에 반달 모양을 그려놓고 그 안에 동전이 들어갈 만한 크기의 구멍을 파놓는다. 제각기 약 5∼6m 떨어진 거리에서 구멍을 향하여 동전 한 닢씩 던져 구멍에 들어간 것을 첫째로 하고, 구멍에 가까운 것부터 순서를 정한다. 첫째가 여러 사람의 돈을 모아 한 손에 쥐어 구멍으로 던져 구멍에 들어간 돈만 따먹고 나머지 돈 중에서 한 닢을 지정하여 이 돈을 맞히는 사람이 따먹는 놀이다.

 

돈치기 놀이 역시 내가 직접 체험해 보지는 못했지만 형의 또래 친구들이 일요일이나 방학 때 한나절 즐기는 모습을 따스한 겨울 햇살이 호젓이 내려앉은 아무개네 담장 밑에서 구경만 했어도 남아의 기질이 절로 자라는 것 같았다. 이 구절에서 한 토막 실소담(失笑談)을 소개하는데 한 형이 돈치기를 하고 싶어 슬그머니 호주머니에 손을 넣어 봤으나 때마침 지닌 돈이 한 푼도 없어 옆에서 돈치기를 구경하던 자기 동생에게 동전 가진 것 있으면 몇 개만 주면 열 배로 불려주겠다고 구슬려서 동전 몇 개를 빌려 돈치기를 했는데 아무리 놀이라 하여도 남의 것을 취하려는 욕심이 동반하면 결과는 뻔한 일 돈치기에서 동전을 죄다 땄던 아이는 욕심이 많았던 탓에 딴 동전을 다시 돌려줄 리 만무했고 동생에게 빌린 동전을 죄다 잃은 형은 난감해했으며 동생은 마침내 울음보를 터뜨렸다. 우리 형제의 주머니를 털자는 그 형의 꿍꿍이로 우리 형제의 호주머니는 순식간에 털렸지만, 마음만은 주제 넓게 흐뭇했다.

 

팽이치기는 얼음판이나 땅 위에서 팽이채를 이용해서 팽이를 쳐 돌리며 노는 아이들의 놀이 썰매 타기와 함께 겨울철 대표적인 놀이다. 얼음이 어는 겨울이 오면 너나없이 팽이를 들고 밖으로 나와 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재미있게 놀았는데, 오래전부터 전국적으로 행해지던 놀이다. 팽이치기만 떠올리면 어느새 쫓아와 나의 아픈 마음을 더욱 아프게 헤집어 놓는 가슴 아픈 일화 한 소절이 떠오른다.

 

중증의 장애를 지닌 탓에 겨울철이면 몸이 굳고 움츠려지기 마련 그해 동짓달은 예년에 비해 극성맞은 한파가 한층 더 기성을 부렸는데 그 시절 그날도 혹한이 무서워 두터운 목화솜 이불을 머리꼭지까지 뒤집어쓴 채 따뜻한 온돌방 아랫목에 배를 깔고 엎드려 삼 남매가 늘 즐겨 보던 만화책을 읽고 있을 즘 모친의 불호령이 삼 남매 뒤통수에 떨어진 것이다. 영문도 모른 채 어리둥절 바라본 모친의 입에서 춥다고 움츠리면 더 추운 법 밖에 나가 움직임이 많은 팽이치기 하며 운동하고 오라는 것이었다.

 

모친의 불같은 성화에 내몰린 삼 남매는 비교적 넓었고 겨울철 얼음이 두껍게 얼기로 소문났던 연산동 안 동네 냇가로 팽이치기하러 갔는데 한두 시간 정도 시린 손 호호 불며 팽이치기하는 형과 누이동생을 지켜보다 지친 나는 더 놀고 싶은 형에게 집에 돌아가자고 조르기 시작했고 끈질긴 나의 성화를 견디다 못한 형이 갈 때처럼 나를 업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 돌부리에 걸려 앞으로 넘어져 무릎이 터지는 외상을 입었는데 이때 등에 업은 동생을 다치지 않게 몸부림치다 자신이 더 많이 다쳤다는 것이다. 나는 이 작은 사고 이후 미안함과 면구함으로 며칠 동안 형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한참 놀기 좋아할 나이에 그놈의 피붙이가 뭔지 혼자 놀아도 시간이 부족할 텐데 부모님 엄명을 어길 수 없어 밖에 나가 놀 양이면 늘 동생을 업어 동행해야 하니 말은 못 하고 어린 나이에 얼마나 피곤하고 짜증이 났을까를 생각하면 지금도 쥐구멍을 찾고 싶은 심정이다.

 

제기차기는 남자 어린이들이 주로 음력 정초를 전후한 겨울철에 즐기며 성행하던 놀이다. 골목 어귀나 마당에서 소년들이 어울려 제기 차는 모습을 요새도 간혹 볼 수 있다. 구멍 뚫린 엽전 등이 흔했던 시절이라 남아들이 직접 손수 제기를 만들어 차기도 했다. 제기차기는 어린이들의 정신 집중력을 길러주며 동시에 온몸 운동이 되는 놀이다. 한 번이라도 더 차올려야 승리하므로 무슨 일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그만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을 깨우칠 수 있고 약삭빠른 눈속임이나 어떤 편법이 통하지 않는 실력 위주 놀이다.

 

제기차기는 유년 시절 내 형이 가장 좋아했던 놀이고 제기차기를 떠올릴 양이면 연상되는 대소담(大笑談) 한 토막이 저절로 떠오르며 입꼬리가 절로 올라간다. 초등학교(국민학교) 2학년이었던 나의 형은 유달리 제기차기를 좋아했던 나머지 하루는 부친이 퇴근 후 책상 서랍에 넣어 둔 붓글씨 연습용 습자지를 찾으시자, 건넌방에서 제기차기 열중하던 형이 손에 쥔 제기를 등 뒤로 얼른 감추는 것이었다. “아차!” 싶었던 부친이 벽장문을 열어 증조부(曾祖父)께서 물려주셨던 유물함(遺物函) 뚜껑을 열어보는 순간, 어이가 없어 입만 “쩍!” 제기를 만들고 싶은데 엽전 따먹기에서 가진 엽전을 죄다 잃었을 뿐 아니라 습자지가 귀했던 시절이라 습자지를 쉽게 구할 수 없었던 나머지 궁여지책으로 부친의 책상 서랍에서 허락도 없이 습자지 몇 장을 꺼냈고 조상님들이 돈으로 사용하셨던 엽전(葉錢)을 꺼내어 제기를 만들려 했으나 실패를 거듭하다 간신히 두 개의 제기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 후로 형은 집안 어른들 입질에

“제 욕구에 필요하다면 조상 상투도 베어 쓸 놈이라,”

는 우스개가 오르내렸다.

 

연날리기는 오랜 옛날부터 전승되어 오는 민족 전래 기예(技藝)의 하나로서 소년에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남성들의 흥미를 끌어 제2차 세계대전 전까지만 해도 음력 정초가 되면 해마다 우리나라 각처에서 성행하여 장관을 이루었던 민속놀이였다. 연을 날리는 데는 연실을 한없이 풀어내어야 하므로 연날리기는 주위의 장애물이 드문 곳에서 행하여졌다. 연날리기는 연령층에 구분 없이 많이들 참여했다. 다른 연과 어울려서 끊어먹기를 많이 하므로 연싸움을 즐기는 사람은 연줄에 돌가루, 구리 가루, 사기 가루 등을 발라 다른 사람의 연줄을 잘 끊도록 하는 행위를 ‘깸치 먹인다.’고 하는데 이 연실 끊어먹기는 대개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청장년은 청장년들끼리 많이 한다. 실을 겹치고 아교를 문질러 매끈하기가 흰말 꼬리 같다. 심한 사람은 자석 가루나 구리 가루를 바르기도 했다. 그러나 연줄을 잘 교차시키는 능력에 따라 승부가 결정됐다. 아이들은 끊어진 연실을 걷느라고 서로 다투어 남의 집 담을 넘어 들어갈 때도 있고 심지어 남의 집 지붕으로 올라가는 일도 있어 말썽을 빚기도 했다. 또 끊어져 나가다가 가라앉는 연을 줍느라고 논바닥을 뛰어가다 진창에 빠져 옷을 버리기도 하였다.

 

연날리기는 우리 삼 남매가 부모님과 함께 쌓았던 추억이 가장 많은 놀이일 것이다. 본가와 외가가 조상 대대로 불교 신앙을 지녀왔던 터라 매년 정월 열나흘이면 부친께서 손수 만드신 연을 가지고 온 가족이 한적한 동해를 찾아 그해의 모든 액운을 멀리 날려 보낸다는 뜻으로 송액영복(送厄迎福)의 글귀를 써서 높이 날리고 실을 끊어 날려 보냈는데 그해의 모든 액운을 멀리 날려 보낸다는 의미와 액막이 연과 시연(試演)의 뜻을 지녔다고 하셨다. 그 외에도 부친의 연 제작 기술이 뛰어나 손수 제작한 갖가지 연으로 연날리기 경연대회에 출전하여 몇 차례 입상 경력을 지니셨다. 부모님은 이미 고인이 되셨고 우리 형제, 남매는 팍팍한 현대사회의 구성원으로 각자의 가정에서 본분과 도리를 다하느라 유년 시절 추억의 연줄을 여태 잡고 있는지 놓아 버렸는지 모를 일이지만 나만은 자꾸만 멀어지는 추억의 연줄을 위해 혼불을 밝히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