松竹♡수필

4부작 연작 수필 | 사계절 추억의 놀이 문화를 찾아서_제2부 여름밤아, 함께 다방구 하자

松竹/김철이 2023. 9. 26. 12:22

4부작 연작 수필 | 사계절 추억의 놀이 문화를 찾아서

 

제2부 여름밤아, 함께 다방구 하자

 

                                                                                김철이

 

 

인생은 추억 쌓기란 말도 있듯이 한번 왔다 한번 가는 인생길에 되새김질할 몇 소절 추억거리가 없다면 먼 훗날 돌아가야 할 길, 노잣돈은 그 누가 챙겨주리. 나와 유년 시절을 함께 보냈던 5060 시대 연산2동 철도관사 코흘리개 악동들은 이러한 인생살이 진리를 어린 나이에 미리 체험하고 깨달았던 것 같다. 먹거리 부족하고 놀잇감 부족했던 그 시절 내 동무 악동들은 요즈음 아이들처럼 “무엇하며 노냐?”며 엄마 아빠 치맛자락 붙잡고 바짓가랑이 붙잡고 칭얼거리지 않았으며 “무엇으로 뭐 하며 놀까?” 고민하지 않았다. 길어야 서른 치 반 넘으면 서른 근 반밖에 안 되는 저들 몸이 놀잇감이었고 저들이 몸 붙여 노는 곳이 최상의 놀이터였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항상 함께하는 놀잇감과 놀이터로 사시사철 밤낮을 가리지 않고 천진난만 연산2동 철도관사 골목골목을 누볐다.

 

군사놀이는 여름 달밤에 소년들이 모여서 군사놀이를 한다. 두 패로 갈라져 서로 팔을 펴서 손을 잡고 일렬 횡으로 늘어선다. 양쪽의 대열이 정돈이 된 후 먼저 동편에 있는 쪽에서 노래를 부르며 칠보 전진하면 상대편은 칠보 후진한다. 다음에 서쪽 편에서 노래에 답하는 노래를 부르며 칠보를 전진하면 동편은 칠보를 후진한다. 이렇게 노래를 부르면서 손을 잡고 전진 후퇴를 여러 번 반복하다가 노래가 끝나면 제각기 동서로 갈라져 진을 치고 상대방 병사를 잡아서 강제로 끌어오는 싸움이 시작된다. 따라서 혼자서 진지에서 이탈하면 포로가 되어 잡혀갈 가능성이 있으니 서로 조심하고 단체행동을 한다. 그러나 한 사람이 진지 멀리 나가면 상대편에서 잡으러 오니 그 기회를 틈타 이쪽에서도 출동해서 잡아 오는 작전을 쓰기도 하는데

 

그 시절 연산2동 철도관사 악동들 역시 노는 모습은 마찬가지였다. 이 시절처럼 텔레비전 컴퓨터로 여가 선용한다는 건 애당초 상상조차 못 했으며 허름한 라디오 한 대 보유했던 가정이 가물에 콩 나듯 했던 시절이라 남녀노소가 무료했던 저녁 시간을 유용하게 보내기 위해 각자 놀잇감을 찾았는데 가장들은 삼삼오오 골목 한 귀퉁이에 평상이나 긴 나무 의자를 깔고 앉아 한 모금의 담배 연기 내뿜으며 하루의 피로와 시름을 한 마디 불평 없을 허공에 날려 보내는가 하면 주부들은 평소 마음 맞는 이의 집으로 저녁 마실 가는데 여기에서 소소한 이야기 릴레이가 이어졌다. 이즈음 동네 아이들은 갖가지 놀잇감을 찾아 하나둘 골목으로 모여들었다. 그 시절엔 골목마다 가로등 하나 있을 리 만무했던 터라 고스란히 달빛에 의존하여 갖가지 놀이에 몰두했었다. 연산2동 철도관사 아이들 또한, 토끼 꼬리만큼이나 짧은 저녁 시간을 제대로 활용하여 놀려고 저녁 밥술만 놓으면 꽁지가 빠지라 골목으로 달려 나가 군사놀이에 합류하곤 했는데 나 역시, 형(兄)의 등에 업혀 나가 골목 한 귀퉁이에 놓인 긴 나무 의자에 앉아 아이들 노는 모습만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지만, 덩달아 한껏 신나 하며 추억 쌓기에 여념 없었다.

 

땅따먹기는 조그만 돌멩이와 함께 즐길 친구만 있다면 어디서든 할 수 있는 놀이, 땅따먹기! 단순한 놀이도구만큼 하는 방법 또한 매우 간단하다. 우선 원하는 크기의 땅을 그린 뒤, 각자 한구석에 손 한 뼘 정도의 자기 ‘집’을 그린다. 집 그리기까지 끝났다면, 이제 공격순서를 정하면 되는데 순서가 된 사람이 자기 집에서 돌을 튕겨 세 번 만에 다시 집으로 돌아오면, 돌이 지난 모든 자리 안쪽이 자기 집이 된다. 세 번 만에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거나, 돌이 경계 박으로 넘어가면 다음 사람으로 순서가 넘어간다. 땅이 남지 않을 때까지 놀이는 계속되고 끝난 뒤엔 집이 가장 넓은 사람이 이기는 놀이다.

 

땅따먹기는 비교적 움직임이 적은 놀이라 아이들과 어울려 놀고 싶은 동심에 앞뒤 가릴 겨를 없이 흙먼지 폴폴 나는 땅바닥에 퍼질러 앉아 한참을 놀고 나면 아침나절 어머니 갈아입혀 주신 바지 궁둥짝이 누렇게 흙물이 들어 어머니께 걱정 들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나 피 끓는 동심을 그 누가 막으랴. 멀찌감치 달아난 세월을 되부를 수 있다면 그때 그 시절 악동 동무들 불러 모아 새로 산 멜빵바지 궁둥짝에 황토 흙물이 들어 어머니 모정 어린 사랑의 매 궁둥짝에 시뻘건 불이 일도록 맞아봤으면…

 

종이 딱지치기는 60~70년대, 궁핍의 시대에는 모든 물자가 귀했다. 먹거리는 물론, 산업화 개발이 성숙화되지 못했던 까닭에 공산품은 한층 더 귀했다. 그랬던 시절이었으니 딱지를 접을 종이 구하기가 그리 수월치가 않았다. 더욱이 딱지는 얇고 가벼운 종이로 접으면 무게가 나가지 않고 가벼워서 딱지놀이를 할 때 상대의 딱지에 손쉽게 넘어가므로 딱지를 접으려면 지난해 달력을 자르거나 헌 공책의 겉표지를 찢어 접곤 했다. 딱지는 공책의 겉표지를 절반으로 접어 두 장을 포개서 접었는데 반으로 접은 종이의 양 끝을 45도 각도로 접은 후 차례로 접고 끼워 완성하곤 했었다. 유년 시절 내 수공으로 가장 먼저 만들어 봤고 가장 많이 만들어 본 것이 종이 딱지일 것이다. 지금, 이 시절이야 각종 종이가 너무 흔해서 무분별하게 버리는 통에 공해가 되는 시대이지만 당시에만 하여도 종이가 귀했던 시절이어서 딱지를 많이 가진 또래 친구들이 무척 부러웠다. 이 시대 아이들이 그때 그 표정을 봤다면 도무지 이해할 수 없겠지만 종이로 접은 딱지는 앞면 뒷면으로 나뉘는데 딱지 따먹기는 바닥에 놓인 상대의 딱지를 본인의 딱지로 힘차게 때려서 넘어가 뒤집히면 따먹게 되는 놀이였다. 요사이 아이들이 봤다면 시시해하고 흥미 없게 여기겠지만 6070 시대에는 무엇이 그리도 재미있었든지 익은 밥 먹고 설익은 일 한다며 꾸짖으셨던 어머니의 걱정을 들어가면서 팔이 아파 몸살이 나도록 딱지치기하곤 했다.

 

종이로 접은 딱지놀이가 단순하고 시큰둥해 보이기 시작하던 시기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 두꺼운 마분지에 그림이 인쇄된 계급장 그림 딱지였다. 계급장 그림 딱지는 마분지에 화투 크기보다 약간 작게 칸을 나누어 그림과 군대 계급이 새겨져 있었다. 그림은 대개가 전투복을 착용한 군인의 모습이나 전투 병기와 전쟁 시 군대와 관계되는 것이었다. 당시는 6·25 한국전쟁 이후 5·16 군사 쿠데타로 군사문화가 팽배해 있던 때이기도 했고, 월남전 파병과 파월 장병들의 무용담이 전해지던 시기라 그랬을 것이다. 인쇄는 컬러 기술이 사용되었지만, 인쇄술이 발달하기 전이라 그림과 색상이 일치하지 않아 벌겋게 번진 인쇄물도 많았다. 계급장 그림 딱지는 현금으로 구매해야 하는 것이었기에 접는 딱지보다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귀한 대접을 받았다. 계급장 그림 딱지는 일일이 한 장씩 가위로 오려내어야 했다. 코흘리개 악동들은 계급장 그림 딱지를 구매하여 행여 한 장이라도 잘못 오려질까 봐 가위로 조심스레 오려내곤 했다. 계급장 그림, 딱지놀이는 어른들 화투 놀이를 본떠 선(先)을 잡은 사람이 딱지를 몇 장씩 포개어 두 군데로 무더기를 지어 엎어놓으면 상대방이 한 군데를 선택해서 딱지 몇 장을 걸어놓으면 뒤집은 딱지 계급의 높낮이에 따라 그 딱지의 장수만큼 따거나 잃는 놀이였다. 딱지에 그려진 군대 계급은 이등병부터 별 네 개 대장과 별 다섯 개 원수까지였는데 때에 따라 이등병도 되고 왕별 다섯의 원수도 미리 돼 보던 시절이었다.

 

종이에 불과한 딱지 그게 뭐라고… 놀잇감 욕심이 남달리 많았던 나는 한 장의 딱지라도 더 따 모으려고 갖은 용을 다 쓰며 또래 악동들과 딱지 따먹기를 하느라 점심밥 챙겨 먹는 것조차 거르기 일쑤였다. 덕인지 탓인지 몰라도 딱지 따먹기에 집착했던 나의 딱지 쌈지는 늘 그득 했고 또래 동무들의 마음속엔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지금 그 시절을 되새김질해 보면 그 시절 내가 왜 그다지도 야박했을까 싶다. 까짓 종이 딱지 몇 장 동무들과 나누었어도 큰 탈 나지 않았을 텐데…

 

다방구 놀이는 가위, 바위, 보로 술래를 정한 후 술래는 전봇대 혹은 담벼락 같은 일정한 장소에 붙어있어야 하고, 술래가 아닌 다른 동료가 붙잡힌 동료의 몸을 같은 편이 터치해 주면 다시금 회생하며, 술래의 장소에서 손이나 발이 떨어지면 터치를 해줘도 살아날 수 없는가 하면 붙잡힌 사람이 방심한 술래의 몸을 발로 세 번 연달아 차면 다시 회생하기도 하는데 이럴 때 만약 두 번을 찼으면 찬 발을 땅에 놓으면 다시 세 번을 차야 회생이 가능하며, 찬 발을 땅에 놓지 않고 계속 들고 있으면 한 번만 더 차면 다시 회생한다. 아울러 터치 시는 반드시 '다방구'를 외쳐야만 회생하는 놀이인데

 

6070 시절 연산2동 철도관사 언저리 해 질 무렵이면 아이들이 하나둘 한 채 건너 소방도로가 나 있던 철도관사 전봇대 앞으로 모여들면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가위, 바위, 보로 술래를 정하고 술래가 된 아이는 전봇대 긴 기둥에 붙어 눈을 감고 서서 하나둘 다섯까지 셀 동안 나머지 아이들은 이리저리 흩어져서 허름한 구석에 숨기도 하고 멀리 뛰어 달아나기도 하고 다섯까지 샌 술래는 숨어있는 아이를 찾아 숨어있던 아이보다 먼저 처음 술래가 서 있든 전봇대로 달려가서 숨어있든 아이 이름을 외치며 손으로 전봇대를 터치하면 그 아이가 술래가 되고 숨어있던 아이가 먼저 가서 전봇대를 치면 그 아이는 술래가 되지 않는데 술래는 다시 다른 아이를 찾거나 달리고 있는 아이한테 쫓아가 그 아이 몸의 어디라도 터치하면 그 아이가 술래 되는 놀이이다. 술래가 되지 않으려고 기를 쓰고 이리저리 마구 뛴다. 특별한 놀이가 없었던 시절이라 매일 저녁 다방구 놀이를 했고 보름달이 훤하게 밝은 날이면 여름밤이 중천에 걸리도록 다방구 놀이를 했었다.

 

함께할 수 없었던 나는 앉아 구경만 하여도 신명이 절로 샘솟았다. 당시 연산동 안 동네는 농사를 지었고 띄엄띄엄 빈집도 있었던 터라 허술히 숨어들 곳이 많았다. 술래가 잘 찾을 수 없는 허술한 곳을 찾아 숨어있다가 잠이 들어 나중에 부모의 꾸중을 들었던 아이들도 있었다. 술래가 몇 번씩 바뀌고, 아이들은 하나둘씩 집으로 돌아가고, 같이 뛰고 놀던 동무들은 기억나지 않으니 처연해진 여름 달빛에 수십 년이 지난 지금은 그 누가 술래이고 그 누가 “다방구야!”라며 호연지기 키우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