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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부작 연작 수필 | 사계절 추억의 놀이 문화를 찾아서_제1부 그 시절 악동들 지금은 어디에

松竹/김철이 2023. 6. 27. 14:05

4부작 연작 수필 | 사계절 추억의 놀이 문화를 찾아서

1부 그 시절 악동들 지금은 어디에

 

                                                                                                                                     김철이

 

 

사람이 한평생을 살면서 추억이 가장 많은 시절이 유년 시절이라고들 하는데 어린 시절 가정사에 따라서 유년 시절이 아름다웠다고 극찬을 아끼지 않는 이도 있고 반대로 가난하고 가슴 아픈 사연들로 인해 떠올리기조차 싫은 시절이 유년 시절이라 마음 아파하는 이도 있지만, 추억의 저장고라 일컫는 유년 시절을 재조명하려 한순간 추억여행을 떠나려 한다. 먹거리 대풍시대(大豊時代)와 놀잇감 홍수시대(洪水時代)를 살고 있는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성장시켜 주었던 그때 그 시절 추억의 놀이를 잠시 잊은 듯싶다. 무심히 흘려보냈던 세월에 면구함을 전하며 선로 따라 멀어진 추억의 놀잇감을 불러 본다.

 

기차놀이는 신기한 것을 따라 해 보려고 하는 아이들의 마음에서 생긴 놀이로 가마타기나 말타기와 같이 탈것을 흉내 낸 놀이를 해왔다. 기차놀이도 이러한 맥락에서 새로운 탈것인 기차를 흉내 내어 가마타기나 말타기처럼 자연 발생적으로 생긴 놀이이다. 그러나 새로운 놀이는 단순한 모방에서 만들어지지는 않는데 우리나라 전역에서 가장 널리 행해진 놀이가 꼬리따기 놀이이다. 기차놀이를 위해 만든 원 형태의 새끼줄은 말타기에서 나무막대기를 가랑이 사이에 끼고 이를 말이라고 여기듯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놀이도구를 선택하였다. 아울러 <조선의 향토 오락(朝鮮 鄕土 娛樂)>에는 전국 각지에 이름을 달리하여 '꼬리따기 등의' 놀이로 소개되고 있고 현재는 기차놀이로 전해져 부르고 있다.

 

구체적으로 우리나라에 기차가 처음 들어온 것이 1889 9월 노량진과 제물포를 잇는 경인선이다. 이듬해 한강철교가 놓인 이후 경인선이 완공되고 이어 1905년 경부선, 1906년 서울과 신의주를 잇는 경의선, 1914년 경원()선과 호남선이 개통됨으로써 기차는 이 땅의 구석구석을 누비게 된 것이다. 아울러 1889년부터 1914년 이후 어느 정도 시기까지 기차는 사람들에게 큰 관심과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아이들은 꼬리따기(잡기)에 재미를 느끼던 터라 기차의 모습을 흉내 내게 되면서 하나의 놀이로 정착되어 자연스레 다음 세대에 이어지게 되었다. 따라서 구체적인 놀이의 시작은 그리 오래되지 않고 일제 강점기부터 시작되었지만, 우리 놀이의 원형은 그대로 간직한 놀이이다. 이 놀이가 만들어지면서 전국 어디에서나 빠르게 그리고 광범위하게 퍼지게 된 이유는 바로 위와 같은 맥락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기차놀이는 훗날 내 죽어, 한 줌의 먼지로 돌아간다고 할지라도 영영 잊지 못할 영혼의 놀이가 아닌가 싶다. 부산 범일동 안창마을에서 태어난 나는 기술직 철도 공무원이셨던 부친의 품에 안겨 누이동생을 임신해 만삭이었던 모친의 등 두들김을 받으며 돌배기로 당시 연산2동 철도관사에 첫걸음을 들였다. 그놈의 정이 뭐라고 그 이후 연산동에서 40여 년, 분구(分區) 이전 연산동이 속해있던 동래구에서 인생 고희(古稀)를 산 현재까지 정 붙여 살고 있는데 나의 유년 시절 연산동은 추억의 천국이었다. 1930년대 연산2동엔 기술자들인 공무원(工務員)들의 사택(철도관사)이 적산가옥(敵産家屋), 57()으로 건립되었는데 그 형태와 규모가 일반 가정주택과는 달리 기숙사 형태로 지어졌다. 두 가구 연립형으로 지어진 철도관사는 그 형태가 앞뒤 구분이 어려웠고 1899년부터 1968년까지 국내 도심지를 주름잡았던 전차(電車)처럼 한 채는 동쪽으로 한 채는 서쪽으로 바라보고 있어 앞뒤 구분을 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한 집 건너 사이로 중간중간 소방도로가 나 있어 기차놀이를 하기엔 세상 최고의 조건이었다.

 

백 퍼센트 철도원 자녀들이었던 연산2동 철도관사 코흘리개 아이들은 사계절 가리지 않고 틈만 나면 기차놀이를 했었다. 당시 철도관사는 담장과 대문이 없었던 터라 중간중간 몇몇 집의 창고를 기차역의 역사(役事)로 삼고 당시 전형적인 시골 마을이었던 연산동 안동네로 달려가 새끼줄 몇 가닥 얻어다 길고 둥글게 묶어 기차를 만든 후, 각자 역무원 역할을 정해 맡겼는데 아무개는 기차를 운행하는 기관사(機關士)의 역할을 아무개는 기차의 운행 관리나 승객의 편의 도모 등에 대한 직무를 수행하는 차장(車掌) 역할을 아무개는 기차역의 사무를 관장하고 지휘, 감독하는 역장(驛長)의 역할을 정해 놀았는데 당시 체격이 우람하고 힘이 셌던 나의 형()이 기관사 역할을 도맡았고 그 시절 온 동네 새침데기로 소문난 한 남자아이를 차장 역할을 정해 맡겼다. 내성적이고 소극적이었던 아이에게 비교적 아이(승객)들과 상호 교류가 많은 차장의 역할을 맡겼던 데는 평소 동네 아이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던 아이에게 아이(승객)들과 자연스레 말을 섞게 하고 어울리게 하여 소극적인 아이의 성격을 적극적으로 바꾸어 볼 악동들의 배려이자 속셈이었다. 몸동작이 자유롭지 못한 내게도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악동들의 배려와 우정이 전해졌는데 나는 장애로 설 수도 새끼줄 기차를 타고 달릴 수도 없으니, 한자리에 앉아서도 능히 해낼 수 있을 역장의 역할을 맡게 해주었다.

 

거의 매일 이어졌던 동네 악동들의 기차놀이 탓에 57가구 연산2동 철도관사 주변은 조용할 날이 드물었다. 새끼줄 기차가 한번 지나갈 때마다 숱한 악동들의 뜀박질로 몸살을 앓던 뽀얀 흙먼지와 떨어져 나간 새끼줄 동강들이 장단도 없이 한데 어울려 허공에 춤추었고 하루 이틀도 아니고 뒤치다꺼리로 참다 짜증이 난 어미들의 하소연이 길고 긴 기찻길처럼 길게 늘어졌다.

똥 푸는 일을 하는 아비의 자식은 날만 새면 똥장군을 지고, 상여꾼을 아비로 둔 자식은 날이 밝기 무섭게 곡소리만 한다더니, 아비를 철도원으로 둔 우리 자식새끼들은 눈만 뜨면 기차 흉내 내느라 꽥꽥거리니 저놈의 기차 종착역은 어디쯤 될는지

그 시절 마냥, 길게만 늘어지던 어미들의 넋두리도, 끈일 새 없이 개구쟁이 악동들의 목청을 통해 달리고 달렸던 ~ ~ 칙칙폭폭 석탄 기차 소리는 멋은 지 오래이지만, 기차놀이는 나이도 먹지 않는지 그 모습 그대로 전승(傳承)되어 전해지누나

 

엿치기 놀이는 일명 엿 꺾기 놀이라고도 하는데, 우리나라 어디에서나 볼 수 있었던 청ㆍ장ㆍ노년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두루 즐기는 소박한 민속놀이 중의 하나로 마을 정자나무 밑에서 엿장수가 쇠로 만든 큰 가위를 떨그럭거리며 찹쌀엿, 호박엿이요. 둘이 먹다가 하나가 죽어도 모를 찹쌀엿 호박엿,”하고 외치면 동네 꼬맹이들이나 남정네들이 모여들어 엿을 사 먹던 시절, 헌 고무신, 깨진 놋그릇, 부러진 담뱃대, 구멍 난 양은그릇 등으로 엿을 샀는데 이러한 고물이 없을 때면 서로 엿값을 물리기 위해 엿치기를 하였다. 엿의 반쪽을  부러뜨려 부러진 엿의 한가운데 입술을 모아 크게 하고 바람을 불어 엿에 난 구멍이 큰 사람이 구멍이 적게 뚫린 사람에게 엿값을 물리는 놀이이다. 엿치기 놀이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두 사람이 엿가락을 골라 끝부분을 잡은 다음, 서로가 동시에 부딪혀서 부러진 쪽이 패하여 엿값을 치러야 하는데 이때 두 사람이 가진 엿가락이 모두 부러지면 재시합을 해야 한다. 또 하나의 엿치기 방법은 여러 사람이 함께 참여할 방법으로 엿판의 엿가락을 한 개씩 고른 후, 동시에 양쪽으로 부러뜨려 끊어진 단면에서 구멍이 제일 크게 나온 사람이 승리하고, 구멍이 제일 작은 사람이 패하여 엿값을 치러야 하는데

 

나 역시, 일대호걸(一代豪傑) 여중호걸(女中豪傑)이라 칭송받던 부모님 끼를 물려받아 사람 좋아하고 놀기 좋아했던 성품이라 장애를 지니고도 갖가지 놀이에 동참했었는데 엿치기에도 열성을 보여 유년 시절 한때는 엿치기 마왕(魔王)”으로 불리기도 했다. 여권상 사대육신(四大六身) 성한 이들과 엿치기한다면 분명히 패자의 위치에 있어야 하고 내기의 엿값을 죄다 치러야 할 것 같은 위인(爲人)이 막상 놀이의 뚜껑을 열어보면 귀신처럼 승자의 위치에 놓여있을 뿐 아니라 한 품의 엿값도 물지 않은 데서 또래 악동들이 붙여준 별명이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승부욕과 집중력이 남달리 뛰어났던 나는 엿치기가 시작되면 온 신경이 초긴장 상태로 돌변하는데 어눌한 왼손으로 엿의 가운데를 쥔 후 왼 무릎에 대고 힘을 주어 부러뜨린 다음 반 토막이 난 엿가락을 한숨의 입바람도 헛됨 없이 한 곳에, 집중시키려고 한껏 오므려 미리 대기 중이던 입술로 잽싸게 가져가 !~”하고 불면 부러진 엿 토막 가운데 누구도 대적할 수 없을 만한 구멍이  뚫려 엿치기는 백전불패(百戰不敗) 나의 승리로 막을 내리곤 했었다.

 

숨바꼭질은 소년 소녀들이 즐기는 술래잡기 또는 숨기 잡기라고 하기도 하는데 같은 또래의 소년 소녀들이, 한데 모여 가위, 바위, 보로 술래를 정한 뒤 그 술래가 숨은 아이들을 찾아내는 놀이다. 조선 시대 아동 유희의 일종이며 이 놀이는 강강술래에서 온 것 같은데 경상도 지방에서는 술래 장난이라고 한다. 놀이 방법은 술래를 정한 다음 모두 숨는다. 정해진 집에서 술래는 쉰, 혹은 백까지 눈을 손으로 가리고 센 후 숨은 아이들을 찾으러 간다. 술래가 숨은 아이를 발견하면 이름을 크게 부르고 달려와 집을 찍는다. 술래 몰래 숨은 아이가 달려 나와 찍었다 하고 외치며 집을 찍으면 그 아이는 다음번에도 숨을 수 있다. 모두 찾으면 그 아이들끼리 가위, 바위, 보로 술래를 정한다. 술래가 더 이상 찾지 못했을 때는 못 찾겠다. 꾀꼬리하고 외치면 그때까지 숨어있던 아이들은 다음번에도 숨을 수 있는 자격을 주는 놀이인데

 

모든 행동이 어눌했던 나에게 있어 숨바꼭질은 생각하기에 따라 마음 아픈 놀이지만, 한때는 술래를 자청했던 시절도 있었다. 그 시절 악동들에겐 학교 숙제가 끝날 시간인 한두 시간, 저녁나절이 진정한 자유의 시간이었다. 하나둘 아이들이 모여들어 골목 안은 악동들의 발놀림으로 인해 금세 뽀얀 흙먼지로 차고 이내 숨바꼭질로 시끌벅적 난리가 나는데 그때마다 술래를 자청했던 나는 부친이 손수 제작해 주신 맞춤형 휠체어에 앉아 한 손을 전봇대에 얹고 느긋하게 지쳐 제 발로 걸어 나올 악동들을 기다렸다. 한참 활동성이 왕성할 아이들의 심리도 그랬지만, 순박하고 단순했던 그 시절의 악동들은 애써 찾지 않아도 한 곳에, 십 분을 지긋하게 숨어있지 못하고 하나같이 제 발로 걸어 나왔기 때문이다. 그 시절, 나는 휠체어에 앉아 세상 어디엔가 숨어있을 육신(肉身)의 참자유를 찾았던 셈이다. 그 시절 숨바꼭질로 온 동네를 시끌벅적하게 했던 연산2동 악동들의 흔적을 지금은 세상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지만, 그 시절 술래를 자청했던 나의 꿍꿍이, 그들은 지금쯤 알아냈을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