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제의 공간

부끄러움 | 겸손기도 마진우 요셉 신부님

松竹/김철이 2023. 9. 19. 09:45

부끄러움

                                           겸손기도 마진우 요셉 신부님


가끔 유투브에서 80년대에 유행하던 패션 스타일을 보게 됩니다. 그때에는 그것이 최신 유행이었겠으나 지금은 그렇게 하고 다니면 너무나도 이상하고 부끄러운 모습이 될 것입니다. 외적 유행이란 그런 것입니다. 고정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문화에 따라 변화하는 것이고 얼마든지 바뀌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유행을 지속적으로 따르려고 애쓰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 됩니다.

하지만 수학에 유행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을까요? 1 + 1이 옛날에는 2였는데 오늘은 4나 5가 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수학적 진리라는 것은 변화하지 않는 것이고 고정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적 진리는 어떠할까요? 신앙적 진리가 시대에 따라서 변할까요? 그것은 다음의 질문과 같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변합니까?

교리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서 여러가지 것들이 변화합니다. 과거에는 야훼라고 부르던 노래를 오늘날에는 모두 '주님'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것이 한국적 지형에서 더 맞는 번역이라고 윗분들이 결정하고 바꾸는 것이지요. 또 텔레비전은 커녕 라디오도 없던 과거에는 상상도 못하던 방송 미사라는 것이 있어서 거동이 불가능한 분들에게 제공되기도 합니다. 인터넷이 없던 시절에는 인터넷 윤리가 필요 없었지만 오늘날에는 인터넷을 어떻게 윤리적으로 이용해야 하는지 연구해야 하는 시기이고 나아가 인공지능에 대한 윤리성도 고민해야 하는 시기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세상의 흐름에 발맞추는 다채로운 교리와는 달리 하느님의 가장 근본적인 뜻이 바뀔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이 어느 날 갑자기 선을 포기하고 악을 사랑하라고 선언하실 일은 없습니다. 하느님이 어느날 외아들 예수는 사실 소용이 없는 존재라고 말씀하실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가장 심오한 뜻은 변함이 없는 법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뜻에 따라 살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부끄러움은 사람들의 시선에서 오지 않습니다. 부끄러움은 하느님을 벗어난 우리의 마음에서 오는 것입니다. 기초적으로는 그것이 양심의 가책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를 지으면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사람들의 양심은 더이상 예전과 같지 않습니다. 세속성이 사람들의 내면을 너무나 지배한 나머지 사람들은 부끄러워하기를 그쳐 버렸습니다. 그 결정적인 증거는 고해소 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마음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살펴보는 것을 좀처럼 하지 않습니다. 그저 주일 미사나 빠지면 쓰레기통에 쓰레기 버리듯이 고해를 보러 옵니다. 그러나 자신의 마음이 얼마나 세속에 물들어가고 있으며 그로 인해서 생겨나는 미묘한 변화를 감지하는 섬세한 영혼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듭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예수님은 모든 사람에게 가르칩니다.

하지만 현대에는 온 세상은 커녕 건물주만 될 수 있으면 온 영혼이라도 갖다 바칠 것 같은 사람들이 흔히 눈에 보입니다. 천주교 신자가 자신의 사업운을 보기 위해서 사주와 점을 보는 일들이 바로 그런 일들입니다. 신문에 나오는 사주풀이를 보면서 은근히 좋은 말이 적혀 있으면 기뻐하는 이들, 거침없이 복권을 사러 가는 이들이 과연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본질 앞에서 그것을 기뻐할 수 있을까요? 친구들 앞에서 신자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 부끄러워 밥 먹을 때 성호조차 제대로 긋지 않는 이들이 과연 주님이 오실 때에 그분을 자랑스럽게 맞이할 수 있을까요? 한편 그런 이들이 멋진 집이나 차를 사게 되면 다른 이들 앞에서 아주 자랑스럽게 여기지 않을까요? 그런 이들에게 십자가는 무조건 피해야 하고 내버려야 하는 일이 아닐까요? 저로서는 여러가지 의문이 들 수 밖에 없습니다.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영광과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에 싸여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