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문장으로
저의 스무 살 초중반 시절의 키워드는 ‘자괴감’이었습니 다. 배우의 길을 위해 노력할 의지는 부족했지만, 욕심이 너무 많았습니다. 노력으로 해소되지 못한 욕심은 어느새 완벽주의로 제 안에 자리를 잡았고, 그 완벽주의는 자기 질 책으로 점점 모습을 바꾸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저 자신을 건강하지 못한 방법으로 낮추며 제가 가진 모든 것들을 다 쓸모없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달란트도, 제 안의 사랑도, 그 무엇도 남아있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 렇게 졸업할 때까지 몇 년을 자책만 하며 살던 어느 날, 어 머니와 이런 대화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엄마, 나는 못난 사람인 것 같아.”
어머니가 대답하시길 “왜 그렇게 생각해? 네가 가진 단 점이 뭔데? 있으면 세 개만 말해봐.”
“나는 너무 예민하고, 욕심도 많고, 무신경해.”
“좋은 문장으로 그걸 바꾸면, 넌 남들이 보지 못하는 부분 들을 신경 쓸 줄 알고, 네가 가진 것들을 발전시킬 힘이 있고, 단순해서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들을 잘 잊을 수 있겠네.”
사실 그때 제가 말했던 세 가지 단점이 무엇인지 기억나 지 않을 정도로 여전히 전 무신경하지만, 그때 어머니가 말 씀하셨던 ‘좋은 문장’은 저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그때 이후로 저는 장단점이라는 개념을 쓰지 않습니다. 사 람에게는 그저 하느님께서 주신 어느 점들이 있을 뿐이라 는 것을 어머니의 말씀을 통해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것을 장점으로 바라볼지, 단점으로 바라볼지는 오직 우리의 몫 이었던 것입니다. 그 이후로는 제가 가진 모든 단점을 바꾸 어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가진 욕심도 더 나은 실력 과 달란트를 위한 원동력으로 생각하기 시작했고, 그 과정 에서 오는 자괴감들도 진정한 나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 유용한 거울로 생각했습니다.
요즘 자존감이라는 단어를 참 많이 씁니다. 특히 제 나 이 또래나 더 어린 연령의 청년들에게는 중요한 단어입니 다. 하지만 자존감을 신앙적인 개념으로 풀어서 설명한다 면 결국엔 하느님께서 주신 나의 좋은 것들을 발견한 상태 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더 나아가서는 하느님의 모상으로 지어진 나 자신을 똑바로 마주하는 상태라고 할 수 있지 않 을까요? 예전에 어떤 신앙 에세이에서 이런 비슷한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교 신앙에 끌렸던 이유 는 그리스도교는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찾는 종교이기 때 문이다.’ 무조건 좋은 것만이 답인 답답하고도 폭력적인 개 념이 아니라 우리가 가진 안 좋은 것들을 그대로 인정하는 신앙. 그리고 그 절망적인 곳에서도 희망을 꽃 피우려 무던 히 노력하고 애쓰는 신앙이 바로 우리가 가진 자랑스러운 신앙입니다. 예민하고 욕심 많고 무신경한 발레리아는 아 직도 제 안에 있습니다. 하지만 친히 당신의 모상으로 저를 창조하신 하느님을 위해 오늘도 저 자신을 좋은 문장으로 고쳐보고 또 하느님의 눈으로 바라보려고 노력합니다. 나 를 위해. 내 안에 계신 하느님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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