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주어진 시간, 그리고 죽음
시간은 괴물처럼 아주 서서히 우리의 생을 야금야금 먹어치운다. 젊었던 부모님을 늙게 하고 병들게 하고 돌아가시게 했다. 고왔던 연인을 어느새 늙은이로 변화시키고, 사랑스럽던 아이들도 서서히 그 과정을 겪게 한다. 이런 면에서 우리가 지나온 생은 각자의 죽음을 향해 걸어온 시간의 누적 층이라 할 수 있겠다. 죽음을 자연의 이치로 여기며 담담하게 받아들이려 애쓰고 있지만 가족이나 가까운 지인을 잃은 상실감은 극복하기 힘들다. 이런 생명의 유한성으로 인한 고통은 우리가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할 실존적 경험이다. 인간에게 죽음이라는 고통이 없다면 삶의 본질에 대해 숙고할 일도 별로 없을 것이다. 생을 귀하게 여기지도 않고 거만한 태도로 얼마나 단순하게 살고 있을까 싶기도 하다.
나는 외할머니의 죽음 즈음에 가톨릭에 입교할 마음을 굳혔고, 엄마의 죽음 즈음에 쉬고 있던 가톨릭의 문을 다시 두드렸다. 가족의 죽음 앞에서 나약한 내가 기댈 데라곤 종교밖에 없었다. 지금도 빠뜨리지 않는 것이 돌아가신 외할머니, 나의 부모님, 시댁 부모님의 영혼을 위한 기도다. 물론 아침기도 중에 잠시 스치며 떠올릴 뿐이지만 그래도 조금은 마음이 놓인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쉴 자리를 마련해 주시겠지, 그들의 영혼을 따뜻한 시선으로 지켜봐 주시겠지, 하는 마음이다.
남편을 일찍 저세상으로 떠나보낸 외할머니는 혼자서 어린 두 딸을 키워야 했다. 그때부터 주님과 성모님은 외할머니가 기댈 유일한 의지처였던 것 같다. 덕분에 강건한 마음으로 평생을 사셨고 매일매일 기도의 힘을 믿으셨다. 그런데 외할머니가 돌아가실 때는 신부님이나 수녀님의 도움을 받지 못했다.(물론 집에서 봉성체를 많이 받으셨다) 마산 구암동 집에서 좀 떨어진, 창녕의 어느 요양병원으로 가신 지 며칠 만에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게다가 가족 중 유일한 신자였던 내가 새 신자였던 터라 돌아가실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돌아가시기 몇 시간 전, 어찌할 줄 몰랐던 나는 주님의 기도와 성모송을 귀에 대고 외워드렸다. 그랬더니 혀가 아래로 처진 채, 죽은 듯 옆으로 누워계시던 할머니가 힘을 다해 기도 손을 공중으로 계속 들어 올리려 하셨다. 이 순간의 영상은 내 머릿속에 강렬하게 남아 있다. 죽음의 순간에 주님과 성모님을 얼마나 갈망하는지 느낄 수 있었다. 이 모습을 본 나는 할머니의 마음이 주님의 세계로 들어가신 거라고 생각한다.
종교가 없는 나의 가족과 지인들은 이런 내 생각을 존중해 주지만 불신하는 눈치다. 그럴 때면 내 느낌을 설명하거나 알 수 없는 세계에 대해 함께 얘길 나눈다. 보이는 삶과 보이지 않는 삶이 있다. 이 둘은 독립된 게 아니라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우리의 삶을 꾸릴 것이다. 하루하루를 살며 주어진 일을 하고 성당에 다니지만 열심이지 않은 것이 보이는 나의 삶이다. 그럼에도 돌아가신 가족에 대해 어느 정도 안도하는 것, 영혼의 안식처를 믿고 싶은 것, 이것도 내 삶의 중요한 일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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