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대간 소통

함께 가는 길 |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을 살기

松竹/김철이 2023. 5. 20. 14:03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을 살기

 

 

아파트 분리배출 하는 날, 플라스틱에 붙은 스펀지를 떼어내느라 30분 넘게 낑낑대고 있었다. 손으 로 큰 덩어리를 뜯어내고 남은 조각을 커터칼로 긁어보지만 깔끔하게 떨어지지 않는다. 이런 수고를 하지 않으려면 단일재질로 된 걸 사야 한다. 물건을 산다는 건 언젠가 처분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한 데, 자꾸 잊어버린다.

 

현재를 살아가면서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생각하는 것은 물건을 사는 일에 국한하지 않는다. 최근 어떤 일로 좀 지쳐있었다. 함께 일하는 사람이 나와 목표하는 바가 다른데도 소통할 의지가 없는 듯 하여 내 마음에 불평이 쌓였다. 그럴 땐 남편을 붙잡고 하소연하면서 그 사람 흉을 보고 나면 좀 나 아질 것이다. 달콤한 유혹이었지만 왠지 성급한 행동 같아서 말을 삼켰는데, 얼마나 다행이었던지. 며칠 후 나는 그 사람과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며 서로 오해하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때 흉보 는 말을 하지 않았던 건 이렇게 될 것을 알고 있어서였을까. 언젠가 오해가 걷히고 생각이 바뀌리라 는 것, 성급히 판단할 일이 아니라는 걸 미리 알았던 걸까.

 

한편, 자녀를 키우는 일이야말로 오지 않은 시간과 함께 살아가는 길이다. 난 이 녀석들이 어떻게 자 라면 좋겠다 하는 구체적인 바람을 품진 않으나, 아이가 무사히 어른이 되고 여러모로 나보다 나은 사람이 되리란 기대는 늘 갖고 있다. 마음속에 그런 기대가 깔려 있기에 반복되는 수고로움도 그럭 저럭 견딘다.

 

하지만 마음에 안개가 잔뜩 낀 듯하여 바탕에 깔린 희망이 보이지 않는 날도 있다. 그런 날엔 육아 자 신감이 낮아져 작은 일로도 덜컥 겁이 난다. 최근의 일이다. 둘째가 뭐 때문인지 골이 난 채 자러 들 어갔고, 나는 거실 소파에 앉아서 오늘 내가 둘째에게 했던 말과 행동을 복기했다. 할수록 한심했다. 아이가 골이 날만 했다. 감수성이 예민하고 눈치가 빠른 애한테 그런 말을 하다니. 사소한 듯 보여도 평생 영향을 미칠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로 인해 아이의 어느 부분이 닫혀버리는 게 아닐까. 아이가 성인이 돼서도 힘들어하는 게 아닐까.

 

그때 불현듯 어떤 사실을 알게 됐다. 내 아이들이 훌륭한 사람으로 자랐다는 사실. 타임머신을 타고 아이들이 성인이 된 시점에 다녀온 것처럼 분명하게 깨달았다. 아, 크고 작은 시련을 겪으면서도 충 분히 좋은 사람이 돼주었구나. 하느님이 그렇게 만드셨구나. 그리고 내가 아무리 스스로 부족한 엄마 라고 느껴도 내 안에는 이미 훌륭한 양육자의 자질이 있다는 것도 알았다. 그 역시 하느님이 하신 일 이었다. 음성이나 환영을 본 건 아니지만 그보다 더 확실히 알 순 없을 것이다. 해파리처럼 기운 없이 소파에 걸쳐져 있던 내가 벌떡 일어나서 무릎을 꿇고 정신없이 감사 기도를 드렸다.

 

현재가 미래로 가는 통로에 불과할 때, 마치 손전등을 비추듯 주변은 까맣고 현재의 자리만 눈에 들 어올 때, 우리의 세계는 좁아진다. 지금 이 순간과 아직 오지 않은 날은 언제나 함께 존재한다. 현재 는 원인, 미래는 결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미래와 현재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존재한다. 하느 님은 날 위해 계획을 세우셨고 난 그에 자유롭게 응답하는 사람이다. 현재와 미래를 동시에 살아내 는 것이 적절한 응답이 되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