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제의 공간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松竹/김철이 2020. 11. 19. 09:47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정호 빈첸시오 신부님(부산교구 괴정성당 주임)

 

  묵상 듣기 : youtu.be/MQGtdjXwuOQ

 

 

이스라엘에 성지순례를 갔을 때 예수님 눈물 성당을 갔었습니다. 멀리 보이는 예루살렘을 보며 우셨다는 예수님의 드문 모습을 생각하며 예루살렘이 예수님을 몰랐던 그 때의 모습과 우리 곁에 계셨던 하느님을 알지 못한 이유에 대해 한동안 생각에 잠긴 기억이 납니다. 

 

성경을 공부하는 이들은 이 복음이 이후 70년의 예루살렘의 멸망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알려줍니다. 그 미래에 대한 예수님의 안타까움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복음의 시간 속에서 바라보는 예루살렘은 무엇인가의 이유로 하느님을 멀게 느끼는 이스라엘의 모습을 먼저 보게 됩니다. 그들이 훗날 멸망의 날을 알았다 한들 그들은 자신들의 모습을 바꿀 수 있었을까요? 눈 앞에 계신 하느님도 알지 못한 그들이니 예수님이 당신을 밝혔다 해도 달라질 이들로 느껴지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에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늘 가르치셨고, 아버지의 뜻에 충실한 아들로 매일을 사람들 사이에서 사셨습니다. 분명 사람들은 예수님과 만났고 함께 밥을 먹었고, 그분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들의 잘못을 미워하며 그들을 구할 생각을 하지 않았던 요나와 달리 예수님은 그들을 구하려 하셨음에도 그들은 그분의 목소리에 끝내 회개의 결심과 실천을 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그들이 말하던 임금으로, 권력과 심판의 칼을 들고 오셨다면 그들은 말을 들었을까요? 그들이 그 힘에 눌려 굴복했다 하더라도 그들에게 바라셨던 하느님의 뜻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겁니다. 예수님의 눈물은 그래서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는 예수님의 답답함으로 느껴집니다.

 

 

구제불능이라는 말이 이스라엘의 현실을 말해주는 듯 합니다. 그 상태의 이스라엘이지만 그들을 구하시려는 의지를 꺽지 않으시고 그곳을 향해 걸으시는 예수님의 걸음은 비장하고 한편으로는 또 다른 답답함을 느끼게 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없는 이들을 위해 온 힘을 쏟으려는 그 정성이 사랑이라는 것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