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제의 공간

"선생님, 물이 출렁거릴 때에 저를 못 속에 넣어 줄 사람이 없습니다."

松竹/김철이 2020. 3. 24. 09:23

"선생님, 물이 출렁거릴 때에 저를 못 속에 넣어 줄 사람이 없습니다."


                                                                              정호 빈첸시오 신부님(부산교구 괴정성당 주임)





강론 듣기 : https://youtu.be/vE3PloI0rqc


서른 여덟해. 오랜 시간 앓아 누웠던 사람이 벳자타 못에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 가까운 곳에 있던 이 못은 하느님의 은총이 흘러 나오는 곳이었고 많은 이들이 하느님의 자비하심을바라며 모여든 곳이었습니다. 그곳에서 누가 더 힘들고 어려운가를 이야기하는 것이 의미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서른 여덟해 그가 아팠던 시간보다 더 애타는 시간이었을 겁니다. 누구도 자신을 돌봐주지 않는 곳에서 그의 고통은 더했을 겁니다. 그에게 닥친 소외감은 몇 배의 힘겨움을 주었을 겁니다. 


그 자리에서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는 이를 만납니다. 그리고 물으십니다. 



“건강해지고 싶으냐?”



상황에 가장 어울리지 않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이 말이었을겁니다. 그는 건강해지고자 이곳에 왔으나 그가 건강해질 방법은 없었으니 말입니다. 그는 자신의 처지가 몸이 아픈 것이 아니라 소외된 것에서 아픔이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선생님, 물이 출렁거릴 때에 저를 못 속에 넣어 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는 동안에 다른 이가 저보다 먼저 내려갑니다.”



그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고통스럽습니다. 겨우 찾아온 하느님 자비의 샘에 들어가지 못하고 계속 밖으로만 밀려나는 자신의 처지가 어땠을지 자신 스스로 말하는 것을 듣는 것이 고통이고 미안함이 밀려옵니다. 그에게 없었던 사람 중 한 사람이 된 기분입니다. 




그에게 누군가 도움을 줄 사람을 찾아야 할 때 예수님은 그를 자리에서 일어나게 하십니다. 물에 들어가지 않고도 누군가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건강해질 수 있도록 주님은 그를 일으키십니다. 세상에서 처음 관심을 가져준 사람. 그가 바로 자신을 일으켜준 것입니다.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이 말입니다. 





복음은 또다시 같은 전환됩니다. 그가 자신의 침상을 들고 있는 것을 문제 삼은 유다인들이 등장하여 그가 잘못하고 있다고 나무랍니다. 겨우 자리에서 일어났더니 이제 하느님의 뜻에 어긋난다고 죄인으로 몰립니다. 그가 자신에 대해 이야기를 하자 그를 낫게 한 이가 또 문제가 됩니다. 자신에게 도움을 준 이가 죄인이 되고 그가 자신을 잘못하게 만든 이상한 상황을 마주합니다. 




결국 또 예수님이 그에게 다가가시어 그를 위로하십니다. 서른 여덟해를 벗어난 사람의 처지를 만들어준 것도 또 기뻐하며 위로한 것도 주님 혼자 뿐이었습니다. 이야기 속의 우리는 사람을 대하며 그를 헤아리지 않는 데 실망스러운 모습입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우리는 이런 상황을 당연한 듯 여깁니다. 내 기준을 모든 것에 들이대며 어느 한 사람도 인정하려 들지 않고 헤아리려 들지 않습니다. 그 속에 같은 고통 속에서도 도무지 도움을 받지 못하는 이가 탄생하고 그가 일어서도 인정하지 못하는 냉정하고 잔인한 문화가 들어섭니다. 





그것을 우리는 현실이라 말합니다. 그래서 그 때도 지금도 그리스도 혼자 우리를 사랑하시고 돌보시는지도 모릅니다. 지금 우리에겐 서로의 처지를 헤아리고 각자 할 수 있는 사랑의 실천이 필요합니다. 안식일처럼 커다란 무게들이 우리에게 장애로 작용하는 것을 느끼는 것도 지금 우리의 처지와 같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에게 안식일은 우리가 서로를 감싸고 노력하는 날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안식일에 일어난 이 사건이 주는 가르침이 우리에겐 참 많이 필요한 듯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