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빅 픽처
돌아보니 인생의 절반 가까이 한국에서 살고 있습니 다. 곧 있으면 반평생을 한국에서 살았다고 할 수 있겠네 요. 솔직히, 한국에 이렇게 오래 살 생각은 없었습니다. 고등학생 때, 저는 물리학, 화학, 생명과학 등 과학 분야 에 관심이 많아서 과학 고등학교에 다녔습니다. 이탈리아 는 낮 12시면 학교 수업이 끝나기 때문에 혼자만의 시간 이 아주 많습니다. 그 시간에 저는 주로 축구를 하거나 베 이스 기타를 연주했는데, 특히 책을 많이 읽었습니다. 다 양한 분야를 책으로 접하고 습득했죠. 그러다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진로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는데, 당시에 저는 오만하게도 혼자 공부해서 안 되는 공부는 거의 없 다고 생각했습니다. 무엇이든 책을 통해 스스로 배울 수 있다고 생각했죠. 이 ‘근거 없는 자신감’은 십대였으니까 가능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아무튼 엄청난 자신감으로, 혼자 공부할 수 없고 대학에 가야만 배울 수 있는 학문은 뭐가 있을까 찾기 시작했고 그렇게 찾은 것이 한자였습니 다. 한자는 도저히 혼자 공부할 수가 없겠더라고요. 그래 서 한자를 사용하는 학문 중에 모두에게 인기가 많은 일 어일문학과 대신 중어중문학과를 선택했습니다. 이 역시 십대 특유의 ‘나는 다른 아이들과 달라! 난 나만의 길을 갈 거야!’라는 독특한 자존감 덕분에 가능한 선택이었죠. 당연히 그때까지 전, 그 선택이 제 인생을 지금으로 이끌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제가 중어중문학과를 선택한 것 은 ‘최고의 선택’이었습니다. 이탈리아 대학에서 중어중문 학을 전공하면서 중국으로 유학을 갔는데, 그때 한국에서 온, 지금의 아내를 만났거든요. 아내는 정말 예뻤습니다. 외모뿐만 아니라 말하는 방식이나 행동 하나하나도 예뻐 서 중국 유학이 끝나고 헤어져서도 몹시 보고 싶었습니 다. 그래서 저는 이십대니까 가능한 사랑의 열정으로 아 내를 만나러 한국에 왔습니다. 그렇게 저는 한국에서 학 교에 다니고, 취직을 하고 결혼을 하고, 사랑하는 두 아이 를 낳으면서 지금까지 한국에 살게 된 것입니다.
이탈리아 말에 “Il Signore ha un disegno su di te.”라는 말이 있습니다. 한국어로 말하면 ‘하느님께는 너에 대한 빅 픽처가 있다.’는 뜻이죠. 저는 알지 못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저를 세상에 보내실 때부터 아내를 만나도록 큰 그림을 그 려놓으셨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십대니까, 이십대니까’ 가 능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하지만, 그 역시 저에 대해 모든 걸 아시는 하느님께서 아내와 만날 수 있도록 그림을 그려주 신 덕분이 아닐까요?
하느님께서 남은 저의 그림을 어떻게 그려놓으셨을지 정말 기대가 됩니다. 물론 저는 당시에는 알 수 없고 훗날 에 그 그림을 어렴풋이 느끼게 되겠지만 어떤 그림이든 하 느님께서는 저에게 딱 맞는 그림을 그려주실 거라 생각합 니다. 하느님께서는 저에 대해 저보다 더 잘 아시니까요.
글·구성 서희정마리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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