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 빈첸시오 신부님 | 20250112 오늘의 말씀
(클릭):https://www.youtube.com/watch?v=jI7axQyB4cE
천주교 부산교구 장산성당 주님 세례 축일 오늘의 말씀입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시고 사람들 앞으로 드러나시는 장면들은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삶과 실천을 통해 구세주의 메시지를 직접 듣기 전의 상황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시기로 전해진 순간부터 주님 공생활의 시작에 이르는 이 모든 일에서조차 주님은 당신의 모든 것을 이미 모두가 알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주님의 이 모든 사건은 ‘이미 정해진 구원사건’으로 정리될 수 있지만, 한 사람에게 일어나는 사건과 내용은 누구도 미리 준비할 수도 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 우리 주님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백성은 기대에 차 있었으므로,”
주님 공현을 끝내고, 일상을 뜻하는 ‘연중시기’로 들어가는 교차점에서 우리는 주님의 세례 사건을 만납니다. 그리고 이 복음에서 오늘 우리는 두 명의 구세주를 보게 됩니다. 백성이 기대에 찬 이유는 그 중 한 명 때문이었는데, 그는 세례자 요한이었음을 우리는 압니다. 그리고 습관처럼 지금도 우리는 예수님의 모습 중 일부를 요한의 잔상에 겹쳐 가지려는 시도를 하곤 합니다. 그만큼 요한은 대단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노력의 정도와 모범을 모두 보여주었고, 충족시켰으니 그를 구세주로 여기고 왜곡되고 잘못된 기억이라도 계속 가지려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진짜 구세주’는 다른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를 하시는데,”
사람들에게 구세주로 여겨지는 요한은 세례를 받지 않습니다. 그는 하느님이 주신 권능으로 세례를 베풀었기에 그렇고 그는 하느님으로부터 세상의 모든 것에서 지켜진 사람이기에 이 세례의 유효성과 자격을 얻습니다. 광야는 하느님이 그에게 허락한 자리이고, 사람들에게는 ‘감히’ 엄두를 낼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우리와 다른 ‘구세주’이기에 더욱 열광과 기대가 끓어오릅니다. 그러나 진짜 구세주는 ‘세례’를 받으심으로 모든 것을 시작하십니다. 그것은 백성에게 허락된 가치입니다. 그들은 죄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리고 벌을 피하기 위해 약을 먹듯 세례를 받았고, 이 위대한 이에게 고개를 숙여야 했습니다. 그런데 구세주도 그들처럼 물에 몸을 잠그고 세례자에게 고개를 숙여 세례를 받았고, 다른 이들처럼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늘이 열리며 성령께서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분 위에 내리시고,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 왔다.”
이것이 구세주를 기다리던 예언자 요한과 사람들에게 나타난 표징이었습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주님의 세례를 하느님의 선언이며, 그 모습을 우리는 거룩한 그림을 보듯 확인합니다. 세례를 베풀고 모든 이가 우러러 보는 요한의 하늘은 여전히 닫힌 채였고, 그에게 세례를 받고 다른 이들과 같이 하느님을 찾는 예수님의 하늘이 열리고, 거기서 비둘기 모양의 성령과 천둥과 같은 하느님의 목소리가 내립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뜻은 요한이 아닌 예수라는 단순한 사실이 첫 번째 의미입니다. 또한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은 말씀을 전하는 요한처럼 사는 것이 아니라 그가 전하는 하느님의 용서에서 시작하고, 거기서 우리가 기다리는 것은 죄에서 일어나 하느님의 뜻을 묻고 기억하며 세상을 살아야 하는 사람들의 삶에 있다는 것이 두 번째 의미입니다. 그리고 구세주는 자신들이 알아보지 못하는 평범하고 다를 것 없는 인생 속에 주어졌다는 것이 결론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외아들은 인류의 구세주요, 세상의 왕이고, 탁월한 예언자이며, 최고의 대사제이지만 여기서 신분을 감춘 것이 아니라 그 자리와 삶을 사람들 사이에 자신의 자리를 정했음을 하느님께 알렸고, 하느님은 그런 아들의 모습에 기뻐하고 계심을 하늘에서 내려진 이 천둥같은 말씀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주님의 세례와 기도는 하느님의 의지가 드러난 모습이고, 우리가 믿는 하느님, 그리고 우리를 사랑하신 하느님의 실제 모습입니다. 그 위에 내린 성령의 비추심과 하느님 아버지의 음성을 기억한다면 이제 일상 연중시기에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은 그렇게 우리 예수님과 같이 일어나서 그분처럼 숨쉬고 살아가며 우리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따로가 아니라 모든 것에 모든 것이 될 수 있도록 또 달릴 길을 최선을 다해 달리며 하느님의 기쁨이 되고 우리의 행복한 하루 하루를 쌓는 것이 구세주의 편에 서는 것이고, 그래야 주님을 기쁘게 기다릴 수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을 잊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의 이야기가 전해준 내용,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라고 했으나, 복음은 주님이 우리 신발 속의 발을 씻어 주셨음으로 당신 생애의 마지막을 채우셨음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렇게 사는 겁니다.
0:00 오늘의 복음
1:21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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