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나라는 자기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자의 것] 대림 제2주간 목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2024 12 12
(클릭):https://www.youtube.com/watch?v=s54QM3otQeE
2024년 다해 대림 제2주간 목요일 – 하늘 나라는 자기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자의 것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을 칭찬하시며 여자의 몸에서 세례자 요한보다 큰 사람은 나지 않았다고 하십니다. 그러면서도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라도 그보다는 크다고 하십니다. 이는 인간에게서만 태어난 존재는 하늘나라 들어갈 수 없음을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물과 성령으로 새로나야 하고 성령은 하느님의 살과 피임을 압니다.
이후 좀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을 하십니다.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 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
여기서 폭행이나 폭력은 긍정적인 의미일까요, 부정적인 의미일까요? 직역하면 이렇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그리고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 나라를 쟁취하고 있다.”
저는 전에 하늘 나라는 예수님 자신을 의미하고 유대 지도자들이 그분에게 폭력을 행사했다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폭력’은 분명 하늘 나라를 쟁취하는 도구로서 부정적 의미로 쓰인 것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교부들의 해석을 읽어보니 대부분은 세례자 요한처럼 자기 자신을 ‘폭력적으로’ 낮추고 버리는 이들이 하늘 나라를 쟁취한다고 해석하고 있었습니다. 이젠 조금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보려고 합니다.
하늘 나라는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혹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령으로 얻는 사랑과 기쁨과 평화입니다. 이를 위해 폭력을 쓰게 하는 자가 세례자 요한입니다.
사실 어린이들은 아버지에게 폭력을 가하며 평화를 얻습니다. 이를 어머니에게서 배웁니다. 어머니는 세례자 요한과 같습니다. 구약에서 레베카 어머니는 야곱에게 에사우의 장자권을 강탈하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폭력입니다. 겨우 불콩죽으로 말입니다. 이것을 가르치는 분이 어머니이고 교회이고 세례자 요한입니다. 인간은 그리스도께 폭력을 가하지 않고는 자녀의 지위를 얻을 수 없습니다. 자녀만이 아버지에게 이러한 종류의 폭력을 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김창옥쇼리부트] ‘아빠, 그동안 어찌 그렇게 사셨어요?’란 프로그램은 조금은 아빠를 고발하면서도 아빠의 마음을 뒤늦게나마 이해하게 되는 내용이었습니다. ‘34년 만에 철든(?) 남편’에서 결혼 34년 차 아내가 남편에 대한 불만을 이렇게 터뜨립니다.
“남편이 전화를 받으러 간 사이 두 아이를 다 자연분만으로 낳았고 친정의 도움을 받아 가며 아이들을 키웠습니다. 아이들이 한창 자랄 무렵 ‘아이가 왜 날 보면 우는 겨~?’ 그 말에 저는 ‘모르는 아저씨라 우는 겨~.’ 했습니다. 이 아이들이 성장하여 큰딸이 34살, 아들이 32살이 되었는데 딸이 결혼해 손녀를 낳고서야 자신이 아이들에게 얼마나 소홀했는지 남편 스스로가 느끼고 있습니다. 손녀가 예쁘긴 예쁜지 카톡 프로필에 사진 올리고 모임에서 자랑까지 합니다. 남편은 30년 전에는 왜 이 기쁨을 몰랐을까요?”
남편은 지금 와서 매우 미안해하면서 아내가 ‘골반’이 좋아서 잠깐 전화 받고 오면 아기가 태어나 있더라는 식으로 말합니다. 사람들은 다 어이없어합니다. 미안하다고 하면 될 것을 골반 이야기만 하는 것입니다.
이때 김창옥 씨가 말합니다. 당시 남편이 15세에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소년 가장이 되었습니다. 어머니와 함께 돌봐야 할 동생이 다섯 이나 되었습니다. 거기다가 어머니까지 부양해야 했습니다. 분명 그때 걸려 왔던 전화는 일에 관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다섯 동생과 어머니, 아내, 두 자녀의 가장으로서 당시는 죽으라면 죽으라는 시늉을 할 정도로 돈을 벌어야 했을 때입니다. 그런데 이제 은퇴하고 손주가 태어날 때쯤엔 아내는 ‘내가 필요할 때 없었던 남편’, 자녀들은 ‘우리가 자랄 때 없었던 아빠’가 되어있습니다. 아빠는 아내와 자녀들을 위해 돈을 벌어야 했던 것은 너무 당연하기에 그것을 주장할 수 없어 그저 미안하기만 합니다.
어쩌면 아이들도 엄마를 따라 아빠에게 폭행하는 게 아닐까요? 아이들의 설문 조사에서 자신에게 고민이 생기면 먼저 이야기를 나눌 사람으로 ‘1. 엄마, 2. 형제, 3. 친구, 4. 선생님, 5. 아빠’라고 적습니다. 아빠는 자녀가 자신에게 제일 먼저 이야기할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50%이지만, 실제로 아이들의 4%만이 아버지를 대화 상대로 여겼습니다. 아이들은 아버지가 해 주는 것만큼 아버지에게 고마움을 느끼지 못합니다. 강탈하는 것입니다.
저의 아버지는 비가 오면 일을 가지 않는 직업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럴 때면 어머니는 돈 때문에 걱정을 하셔야 했습니다. 저도 아버지가 일을 나가지 않으면 불안했습니다. 저도 모르게 아버지가 집에 계시면 “오늘은 일 안 가?”라고 물었던 기억이 납니다. 어느 날은 아버지가 서운하셔서 조금 화를 내셨던 것도 기억합니다. 아들인 제가 돈 벌어오는 기계처럼 당신께 폭력을 행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돈은 바로 성령과 같이 저에게 사랑과 기쁨과 평화를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폭력을 당해주는 분이 계신다는 것이 행복입니다. 어린 양은 구약에서 폭력을 당하였습니다. 그 피가 문설주에 칠해지고 그 살이 그들에 의해 먹혔습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먹히며 자녀에게 평화를 줍니다. 이것을 아는 자녀들은 가출하지 않습니다. 가출해서 살아봐야 부모에게 폭력을 행사하며 사는 것보다 나아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녀는 어떻게 해서든 부모에게 폭력을 가해서 부모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합니다. 그래야 그분이 사는 곳에 살 수 있는 존재로 성장합니다.
이렇게 이해하면 세례자 요한이 왜 ‘엘리야’와 같다고 했는지 이해가 갑니다. 엘리야는 하늘에서 불을 내렸습니다. 그때 바친 제물은 소였습니다. 제단에 바쳐지는 소는 바로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하늘 나라가 폭력을 당한 것입니다. 하느님은 그 아드님을 사르기 위해 성령을 불을 내려주셨습니다. 그 불로 우리가 하늘 나라를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자녀는 엄마를 통해 아버지에게 폭력을 행사하여 하늘 나라를 쟁취하는 존재들입니다. 그런 존재일 수 있음을 아는 게 하늘 나라입니다. 아버지에게 돈 벌어오라고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존재가 된 것 자체가 바로 행복이란 뜻입니다. 우리는 아버지께 당연히 아드님을 죽여 그 살과 피를 내어달라고 청할 수 있습니다. 이 위치란 얼마나 행복한 위치입니까? 하느님께 이러한 폭력을 쓸 줄 아는 존재만이 하늘 나라의 행복을 차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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