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문
김철이 비안네
명의라고 소문난 크리스천 의사의 병원에 중병에 걸린 한 환자를 찾아갔다. 환자는
"의사 선생님!, 제가 회복할 수 있을까요?"
라고 물었고. 의사는
"글쎄요, 아마 어려울 겁니다"
하고 답했다. 환자가 재차 말하길
"저는 죽음이 몹시 두려워요. 무덤 저편에 무엇이 있는지 선생님은 아세요?"
의사는 솔직히 답했다.
"아니요, 죽음 저 건너편에 있는 모든 것을 누구도 알 수는 없습니다."
그때 원장실 문이 열리더니 의사의 가정에서 기르는 개가 뛰어 들어와 주인에게 뛰어올라 꼬리를 치면서 좋아했다.
그때 의사는 환자를 돌아보며 말했다.
"보셨지요?. 이 개가 우리 집에서만 줄곧 지내다 이 방엔 한 번도 들어와 본 적이 없었지만 자기 주인이 여기 있을 거란 걸 알았기 때문에 아무 두려움 없이 뛰어 들어온 것입니다. 죽음 저편에 무엇이 존재하는지는 말씀드릴 수가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우리 영혼의 주인이신 주님께서 그곳에 계신다는 것은 믿고 있습니다. 아무 걱정하지 마시고 환자분께서 의사란 저의 신분만을 믿고 저를 찾아오셨듯이 좀 전에 제가 말씀드린 분명한 사실을 믿기만 하십시오. 문이 열릴 때 아무런 두려움 없이 들어가실 수 있을 것입니다."
인디언들이 아메리카 서부의 대평원을 거침없이 누비던 때 '죽음의 계곡'이라는 골짜기가 있었다. 용감한 개척자들. 탐험가들이 말을 달려 이 계곡으로 가기만 하면 돌아오지 못했다. 어느 날 몸동작이 날쌔고 재빠른 젊은이가 그 이유를 알아보기로 굳은 결심을 했다. 동료들은 그의 뜻을 말류 했으나, 그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어느 화창한 여름날 계곡을 향하여 말을 달렸다. '죽음의 계곡' 근처까지 왔으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젊은이가 계곡의 굽이까지 왔을 때 두 갈래의 길이 있었다. 한 길은 사람이 지나기에 편한 길이고 다른 한 길은 나무 가시와 넝쿨로 무성하게 얽혀진 길이었다.
양편 길 모두 계곡 아래 강으로 통하는 길이었다. 이 젊은 탐험가의 첫 번째 유혹은 넓고 쉬운 통로를 선택하는 것이었다. 평소 조심성이 많았던 젊은이는 나뭇가지를 꺾어 넓은 길 끝 강을 만나는 지점에 던져보았다. 순간 놀랍고 두려운 사실을 알아냈다. 나뭇가지는 땅속으로 가라앉고 말았다. 그곳은 모래펄이었다. 마침내 젊은이는 많은 사람이 돌아올 수 없었던 이유를 알아냈던 거였다. 그 넓은 길은 보기에는 쉽지만 죽음의 계곡으로 직통하는 길이었다. 그는 칼을 꺼내어 좁은 길을 막고 있는 가시넝쿨을 해치고 강으로 통하는 길을 만들었다. 길의 끝자락에 통나무가 모래펄 위에 걸쳐진 것을 발견하고 이 통나무를 타고 계곡 건너편으로 안전하게 건널 수 있었다.
한 억만장자가 재계의 변동으로 막대한 재산의 큰 피해를 입어 알거지가 되었다. 그의 전 재산이 약 일 억 삼천육백사십 원이 남아 있다는 통고를 은행으로부터 받았다. 우리에게 일 억 삼천육백사십 원이란 결코 적은 돈은 아니지만, 억만장자는 은행의 통보에 충격을 받아 죽었다. 한편, 억만장자의 유일한 상속자인 가난한 조카는 자신이 아저씨 재산의 상속자라는 소식을 전해 듣고서 갑자기 일 억 삼천육백사십 원이란 거액이 생겼다는 소식에 충격으로 그만 죽고 말았다. 같은 액수의 돈에 한 사람은 적다고 죽고, 한 사람은 너무 많아서 충격을 받아 죽었다.
죽음은 분명 슬픈 존재이고 두려운 존재다. 하지만 부활의 희망을 품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은 마냥 슬퍼하거나 두려워해야만 하는 대상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은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과정이며 끝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우리 교회는 위령미사 감사송은 이렇게 노래한다.
"주님, 믿는 이들에게는 죽음이 죽음이 아니요 새로운 삶으로 옮아감이오니 세상에서 깃들이던 이 집이 허물어지면 하늘에 영원한 거처가 마련되나이다."
따라서 위령성월을 맞은 우리는 오히려 적극적인 자세로 죽음을 준비하고, 죽은 이들이 하느님 안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봉사와 희생 그리고 기도로써 힘껏 도와야 한다.
우리는 죽은 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죽음을 묵상하면서 그 너머에 있는 영원한 희망을 바라보아야 하고 더불어 우리는 그 희망을 위해 우리는 오늘의 삶에 충실히 하는 자세로 노력하며 자신의 삶과 신앙을 되돌아야 한다. ‘죽음’에 대한 묵상이 곧 ‘삶’에 대한 묵상이다, 죽음을 잘 준비하는 것이 곧 삶을 잘 살아가는 삶임을 잊지 말고 위령성월을 맞아 죽음의 의미를 다시금 되새기며 세상을 떠난 이들과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서 지워진 이들을 위한 기도에 정성을 보태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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