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르익은 곡식은 고개를 숙인다
김철이 비안네
삼십여 년 전 경상북도 경산에 살았던 이십 대 초반의 한 처녀는 희귀 피부병인 '열성 이영양성 수포성 표피박리증'이라는 병명도 생소한 이름의 병을 앓고 있는 처녀였다. 그녀는 어렸을 때 온몸에 물집이 생기고 피부가 짓무르면서 거의 성장을 멈추었다. 현재 그녀의 나이 쉰 살이 넘었겠지만, 당시 이십 대 초반이었던 그녀의 몸무게는 10Kg 밖에 나가지 않아 겉으로 보기에는 서너 살 난 아이와 같았다. 그녀의 어머니는 막노동으로 이십여 년간 그녀의 병시중을 들었으며 이웃 주민들의 따스한 온정으로 귀한 성금을 전달받기도 했다. 세상 사람들은 그녀가 자기 나이에 걸맞은 성장을 하지 못한 상태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오감으로 판별하기 어려운 영적으로 성장하지 못하는 병에는 무관심한 경우가 많다. 이 병은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지 않아 영양을 제때 공급받지 못해 열매를 맺지 못하는 영적 중병이다.
두 아들이 부모님의 지극한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며 성장해 나아가고 있었다. 한 아이는 여덟 살이고 한 아이는 여섯 살인데, 점차 어버이날이 다가오자 제각기 부모님께 선물을 드린다고 법석을 떨었다. 저금통을 깨뜨려 그간에 모아 놓았던 용돈을 가지고 백화점으로 선물을 사러 나갔다. 큰아이는 그래도 생각이 있어서 어머니의 루주와 아버지의 면도용 비누와 거품 솔을 사 들고 왔다. 아침마다 화장하는 어머니와 면도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작은 아이는 두 가지 장난감을 사 들고 왔다. 제 생각에 장난감이 제일 좋아 보이니까, 부모님도 틀림없이 좋아할 거라고 여겼다. 이게 바로 미숙아라는 것이다. 부모님을 위한다면 부모님이 기뻐할 것을 찾아야 한다. 작은 아이는 제 시각에서, 자기중심적 생각으로 사랑하고 생각했기 때문에 제 장난감을 사 들고 부모님 앞에 선 것이다.
신앙으로 채 성장하지 못한 어린 영혼은 남들이 칭찬할 때 기뻐하고, 비난할 때 슬퍼하고 좀 더 성장하면 남들이 비난할 때 기뻐하고 남들이 칭찬할 때 두려워한다. 조금만 더 성장하면 남들의 칭찬이나 비난에도 별로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성장된 영혼을 지닌 이는 사람의 인정과 비난은 헛된 것이며 전능하신 분으로부터, 오는 것만이 영원하며 온전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육체가 자라날 때도 성장통을 겪는 것처럼 우리 영이 자라날 때 역시 성장통이 순간마다 찾아온다. 아울러 이 아픔과 고통의 순간은 결코 좌절의 대상이 될 수 없음을 기억해야 한다. 고통을 통해 우리의 불필요한 부분들이 잘려져 나간다. 그러나, 아무리 크게 다가오는 고통이라 하여도 우리를 무너뜨릴 수 없다. 오히려 우리를 주님께로 더 가까이 다가설 수 있게 할 것이다.
가을이 코앞에서 익어간다. 가을은 성숙한 계절이다. 가을을 통해 우리는 성숙의 아름다움을 배운다. 곡식은 무르익을수록 머리를 숙인다. 우리는 고개 숙인 곡식을 보면서 겸손을 배운다. 무르익은 곡식은 말이 없다. 언어장애를 지녔기 때문이 아니라 대자연의 섭리를 미리 다 알면서도 말하지 않을 뿐이다. 우리는 무르익은 곡식에서 침묵의 소중함을 배운다. 무르익은 곡식은 가을걷이를 기다린다. 무르익은 곡식의 절정은 자신을 내어줌에 있다. 따스한 봄 햇살에 성장하고 뜨거운 여름 햇볕 아래 영글었던 곡식이 이제 자신을 내어주기 위해 스스로 목을 늘인다. 곡식은 모름지기 자신을 위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숙한 사람은 깊이가 있고 무심코 내뱉는 말 한마디에도 무게가 있다. 전체를 보는 안목이 넓다. 다양한 사람을 좋아하고 나날이 변하는 변화에도 적응을 잘한다. 성숙한 사람은 남을 배려할 줄 안다. 나 자신을 생각하고 소중히 여기기보다 전체를 생각하고 조국을 생각하고 지구촌을 생각하며 소중히 여길 줄 안다. 성숙의 극치는 자신을 내어주는 데 있다. 우리는 예수님의 성경 속 모습 속에서 성숙을 배운다. 예수님의 인격이야말로 무르익은 인격이다. 성경으로 마주하는 예수님의 언어는 깊이 있는 언어이다. 인류를 위해 십자가에서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신 예수님의 삶 속에서 성숙의 절정을 배운다. 우리 함께 자연을 통해 성숙을 익혀 배우고 예수님의 십자가 모습을 통해 성숙을 배우자. 미숙함의 일을 벗어버리고 성숙함에 이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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