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 발표작

혈세(血洗)_(수필)한비문학

松竹/김철이 2024. 8. 29. 17:49

혈세(血洗)

 

                                          김철이

 

 

인성을 지닌 사람들은 자기 생각이나 계획이 무산되면 실패라고 치부해 버리고 그 일을 쉽사리 포기해 버린다. 반면에 자기가 구상했던 일이나 계획이 이루어져야만 성공이라고 여기는 고정관념이다. 그러나 때로는 자기의 생각이나 계획이 완전히 무너진 다음에야 비로소 더 큰 일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것이 바로 포기의 섭리다.

 

참고 희생하며 기다려야 얻을 수 있다는 진리를 대변해 주는 단편적 이야기다. 목재를 다루는 기술이 남달리 뛰어난 도 목수와 그의 제자가 함께 큰 숲을 지나갔다. 그들이 크고 아름다운 떡갈나무 기슭을 지나갈 즘 도 목수가 제자에게 물었다.

"너는 무엇 때문에 저 나무가 저렇게 거대할 정도로 크고 마디가 있으며 아름다운지 알고 있느냐?"

제자는 스승을 바라보며 답했다.

"아니오. 왜 그렇습니까?"

그러자 도 목수가 말했다.

"왜냐하면 저 떡갈나무는 유용하게 쓸 수 없기 때문이란다. 만일 저 고목이 쓸모가 있었다면 이미 오래전에 베어져서 탁자나 의자로 만들어졌을 것이다. 저 떡갈나무는 아무 쓸모가 없었기 때문에 저렇게 크고 아름다운 나무로 자라게 두었고 이젠 주변을 지나 오가는 나그네들이 저 나무의 그늘에 앉아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고목이 된 것이지!"

 

어느 임금이 한 신하를 불러 엉뚱한 어명을 내렸다.

"저기 저 버드나무 밑 우물물을 길어 저기 저 밑 빠진 독에 가득히 채우시오."

그러나 밑 빠진 독에 물이 채워질 리가 만무했다. 그렇지만 충성스러운 신하는 오직 임금의 명령만 생각하면서 밤을 낮 삼아 물을 길어 날랐다. 결국 우물 바닥이 드러나고 말았다. 그런데 우물 바닥에 무엇인가 번쩍이는 물체가 보였다. 그것은 엄청나게 크고 눈부신 금덩어리였다. 신하는 임금 앞에 무릎을 꿇었다.

"임금님!, 용서하소서. 독에 물을 채우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전하의 명도 없이 우물물을 퍼내다 바닥에서 이 금덩이를 건졌나이다."

임금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밑 빠진 독에 물을 채우겠다고 우물이 바닥나도록 퍼내느라 수고했구려. 경은 참으로 충성스러운 짐의 신하요. 그 금덩이는 이다지도 충성스럽게 순종하는 경을 위해 미리 준비했던 것이라오. 그러니 이 금덩이는 경의 몫이오."

 

세상에는 꾀를 내세우며 똑똑한 체하다가 망하는 사람이 숱하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은 모두가 같으니, 세상은 충성된 사람의 성실함을 기억하기 마련이다.

 

항구에 정박한 한 상선에서 선장의 아들이 원숭이와 어울려 놀고 있었다. 그런데 원숭이가 갑자기 소년의 모자를 낚아채 돛대 위로 올라갔다. 소년은 모자를 되빼앗기 위해 정신없이 무작정 원숭이를 뒤쫓았다. 소년이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는 너무 높은 곳으로 올라가 있었다. 발밑을 내려다본 소년은 겁에 질려 더 이상 움직일 수가 없었다. 소년은 엄청난 공포에 질려 꼼짝도 못 한 채 몸을 사시나무 떨 듯하며 밧줄을 잡은 채 울음을 터뜨렸다. 매우 다급하고 위험한 상황이었다. 그때 선장이 돛대 위에서 울고 있는 아들을 향해 권총을 겨누었다.

 

"아들아!, 밧줄을 놓고 빨리 바다로 뛰어들어라. 그렇지 않으면 총을 쏘겠다."

소년은 아빠의 단호한 경고에 두 눈을 감고 파도가 넘실대는 바다로 뛰어들었다. 아버지의 말만 믿고 뛰어내린 것이다. 그러나 물속에서 솟구쳐 올랐을 때는 아버지의 아늑한 품에 안겨 보트에 태워져 있었다.

 

오래전 강원도에서 버스가 전복하고 많은 사람이 희생된 일이 있었다. 이미 죽은 사람, 앞으로 살 것 같은 사람, 죽을는지 살는지 알 수 없는 사람, 이렇게 세 분류로 구분해 놓았는데 지금 피가 모자라서 너무 어려웠다. 그런데 생존할 가능성이 불투명한 한 사람이 의사를 보고 간청했다.

"여보세요. 날 좀 보세요. 내 피는 O형인데 웬만하면 누구에게나 맞을 겁니다. 빨리 내 피를 뽑아서 저 사람에게 넣어 주세요. 나는 한평생 나쁜 짓만 했습니다. 나는 깡패 두목이에요. 남의 것을, 강제로 빼앗는 짓만 해 왔어요. 내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남을 위해 좋은 일 한번 해보고 싶어요. 내 피를 뽑아서 저 사람에게 넣어 주세요."

 

삼십여 년 전 강원도에 큰비가 내려 물이 넘쳐서 철로에 있는 철교가 무너졌다. 한 시골 노인이 주변을 지나다 보니 멀리서부터 어느 순간 우렁차게 울리는 기적소리가 들렸다. 곧바로 열차가 달려오는 것이었다. 노인은 열차에 탑승한 승객들을 구하기 위해 자신을 돌보지 않고 낫으로 자신의, 허벅지를 베고 명주 적삼을 찢어서 붉은 피로 물들이고 높은 언덕으로 급히 올라갔다. 그는 큰 고함을 지르면서 붉은 피로 물든 적삼을 흔들어댔다. 목적은 기관사가 붉은색을 발견하고 열차를 멈추게 하기 위해서였다.

 

노인은 손에 든 적삼을 여전히 흔들어댔고 다리의 피는 계속 흐르고 있었으며 외치는 소리는 점점 낮아졌다. 바로 그 위기일발의 순간 기관사는 갑자기 붉은 피의 적삼을 발견하고 즉시 브레이크를 밟아 열차를 세웠다. 기진맥진한 노인은 이미 피바다 위에 쓰러졌지만, 열차 안의 사람들은 아직 왜 열차가 멈춰 섰는지 알지 못했다. 모두 열차에서 하차한 후에야 철교가 무너진 현실을 알고서 몸서리쳤다. 노인이 자신의, 몸은 돌보지 않은 채 피를 흘려 그들을 구했음을 알았다. 아무리 수소문해도 노인의 연고를 찾지 못했던 탓에 그 사고 때 열차에 탑승했던 이들이 힘을 모아, 노인의 상을 치르고 시신을 노인이 숨졌던 언덕 위에 안치했으며 아울러 돌비 하나를 세웠는데 비 위에는 "우리를 위해 그가 죽다."라고 아로새겼다.

 

가톨릭 교리상에 정식으로 세례를 받지 못한 사람이 신앙 때문에 목숨을 바친 이를 두고 혈세를 받은 이라고 하는데 굳이 신앙인이 아니라 하여도 타인을 위해 희생한 이들 또한 혈세를 받을 자격이 있질 않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