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 빈첸시오 신부님 | 20240617 오늘의 말씀
(클릭);https://www.youtube.com/watch?v=8iq48nAwi00&t=1s
천주교 부산교구 장산성당 연중 제11주간 월요일 오늘의 말씀입니다.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
예수님의 생애를 대하고 읽고 묵상하며 세상을 사는 것은 참 행복한 일입니다. 그 일에는 흑백을 고민할 필요가 없고 이럴수도 또 저럴수도라고 말하는 갈림길이 없습니다. 같은 세상을 살면서도 그늘이 없는 이유는 그분의 모든 것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려하고 망설이고 고민할 이유도 없이 선명하고 깨끗하게 주님의 삶은 드러납니다. 우리는 여전히 허점이 많고 실수도 잘못도 많지만 그런 주님을 따를 수 있음은 행복한 일입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아주 오래된 규칙처럼 여겨지는 이 법을 ‘동태복수’라고 말합니다. 같은 가치와 형식으로 갚아준다는 것은 일종의 ‘정의’와 같습니다. 그런데 이 내용은 먼저 당한 이의 입장에서는 결코 그 가치가 같지 않습니다. 그대로 갚아준다는 것은 사실 가능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보복이라는 것은 내용으로 헤아리면 훨씬 무겁고 또 잔인한 상태에서 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정의를 찾을 수 있다면 그것은 그것을 지켜보는 이에게서나 찾아집니다. 아프기 때문에 똑같이가 아니라 일방적으로 그에 대한 미움과 분노가 될 일이 많습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예수님은 이번에도 우리에게 새롭게 들리는 그러나 율법 안에 품은 생각을 드러내십니다. 하느님의 뜻은 그렇게 서로 나빠지기만 하는 복수의 연결고리를 끊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럼 억울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당연히 있겠지만 그것을 갚는다고 갚아버리면 그의 잘못은 물을 수 없고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한 죄의 무게를 짊어져야 합니다. 이기적으로 보아서도 그렇습니다. 당장 미움이 풀릴지도 모르지만 만일 그가 나는 책임졌다라고 선언한다고 그의 잘못이 사라지겠습니까?
“오히려 누가”
예수님의 이야기는 한 발 더 나아가십니다. 혹시라도 누군가가 자신에게 무엇인가를 원한다면 그가 필요한 만큼을 더 헤아려라는 이야기입니다. 딱 그 몫이 사랑의 크기가 될 겁니다. 달라고 주는 것은 좋은 마음 좋은 행동이겠지만 사람을 앞에 두고 또 세상을 앞에 두고는 ‘해야 할 일만’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바라는 것을 헤아리고’ 그것을 함께 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하느님을 이해하는 것이어야 하고 그 믿음이 기쁜 이유도 그런 하느님의 사랑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행복은 결국 우리가 누군가에게 베푸는 그 선행으로 이루어진다는 것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0:00 오늘의 복음
1:11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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