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대간 소통

말씀의 이삭 | 한 걸음씩 자분자분, 그래도 괜찮아

松竹/김철이 2024. 5. 14. 08:45

한 걸음씩 자분자분, 그래도 괜찮아

 

 

꽃들에게 물을 주었습니다. 대문 안에 있는 수도와 연결 박지현 요셉피나 | 방송작가 겸 수필가 잔돈을 바꿔서 10센트를 넣으니 바로 열렸습니다. 아무도 된 긴 호스로 주면 되는데, 그조차 귀찮을 때가 있습니다. 그럼 물통에 받아서 물을 주게 되는데, 문제는 물통이 커 서 저에겐 버겁다는 겁니다. 그걸 알면서도 저는 한꺼번에 물을 가득 채워서 물을 줍니다. 욕심이지요. 무거운 물통 을 들고 물을 준 날엔 어깨와 허리, 갈비뼈 부분이 뻐근해 집니다. 그럴 땐 물통을 3분의 1 정도만 채운 다음, 한 번 이 아닌 몇 번에 나눠서 왔다 갔다 합니다. 뭔가를 할라치 면 예전엔 완벽하게 다 채워야만 하고, 한 번에 많은 양의 일을 해내야만 그다음 일이 수월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야만 능력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을 것 같았습니다. 그 런데 주어진 일을 해내고 빨리 성과를 내는 것도 중요하지 만, 그 일을 할 수 있는 제 역량의 한계를 인정하는 게 더 중요하단 걸 깨달은 겁니다. 누가 알려주었을까요. 작은 길의 성녀 소화 데레사입니다. 그분은 제 삶에 많은 영감 을 주시며, 크고 특별하고 거창한 길만을 찾아 헤매온 저 에게 하느님의 아이가 되어 작고 평범한 길을 한 걸음씩, 자분자분 걷는 인생도 있다는 걸 안내해 주셨습니다.

 

4년 전, 남편과 함께 산티아고 순례에 나섰습니다. 프 랑스 생장으로 가기 전에 소화 데레사 성녀가 태어나고 자란 프랑스 알랑송과 리지외에 들러서 3박 4일 피정을 했습니다. 오랫동안 바친 기도의 응답이었던 걸까요. 리 지외에 머무는 동안 저희는 말로만 듣던 작은 길의 영성 을 직접 체험했습니다. 버스 정류장의 유료 화장실에 갔 을 때의 일입니다. 20센트짜리 동전을 넣었는데 열리지 않는 겁니다. 청소부에게 물어보니 10센트짜리 동전만 넣 으랍니다. 암만 뒤져도 10센트는 없었습니다. 100유로, 10유로짜리 지폐가 있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10센트 동 전은 쓰임새가 없다고 여겨서 소홀했던 거지요. 간신히 잔돈을 바꿔서 10센트를 넣으니 바로 열렸습니다. 아무도 열지 못한 화장실 문을 작은 동전 한 개가 연 겁니다.

 

작음이 뭐가 문제일까요. 꼭 큰 물통에 물을 가득 담아 서 낑낑거리며 줄 일이 뭐냔 말이지요. 제가 감당할 수 있 을 만큼의 무게로 나눠서 조금씩 주다 보면, 꽃들과 더 많 은 시간을 보낼 수 있고, 저 역시 작고 평범한 행복감을 맛 볼 수 있을 텐데요. 리지외에서 체험한 동전 사건 덕분에 저는 800킬로미터나 되는 산티아고 길을 한 번에 무리해 서 걷지 않고, 한 걸음씩 천천히 걸으며 너무 작아서 흔히 들 지나치는 들꽃과 바람과 하늘의 맑음을 만끽할 수 있었 습니다. 그 힘들다던 피레네산맥은 제게 한 걸음의 기적을 맛보게 해준 작은 길이었습니다. 커다란 물통에 물을 다 채우고픈 욕심이 날 때마다, 소화 데레사와 작은 동전을 떠올립니다. 이처럼 저는 크고 특별하고 위대한 것만이 소 중하다고 여긴 과거의 생각들을 떨쳐 버리면서, 어린아이 처럼 작고 평범하고 약한 존재가 되어도 괜찮다고 알려주 시는 성녀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중입니다. 잘 되지는 않지 만, 한 걸음씩 해보는 겁니다. 천천히 말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