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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삼용 요셉 신부님 | 그건 설득이 아니라 설교다,연중 제30주간 월요일, 2023 10 30

松竹/김철이 2023. 10. 30. 07:12

[그건 설득이 아니라 설교다] 연중 제30주간 월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2023 10 30

(클릭);https://www.youtube.com/watch?v=7QF5MMyVw9I

 

 

 

가해 연중 제30주간 월요일 – 그건 설득이 아니라 설교다

누군가 “신부님 강론은 설득이 아니라 설교입니다”라고 하면 기분이 어떨까요? 어쩌면 오늘 복음은 강론이 단순한 설교가 아닌 설득이 되려면 어떤 것이 필요한지 잘 알려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열여덟 해 동안 병마에 시달려 허리를 조금도 펼 수 없었던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인아, 너는 병에서 풀려났다.”
그러자 회당장이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시는 것을 보고는 분개하여 군중에게 말합니다. 
“일하는 날이 엿새나 있습니다. 그러니 그 엿새 동안에 와서 치료를 받으십시오. 안식일에는 안 됩니다.”
이것은 회당장의 설교입니다. 예수님은 더욱 설득력 있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위선자들아, 너희는 저마다 안식일에도 자기 소나 나귀를 구유에서 풀어 물을 먹이러 끌고 가지 않느냐?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딸인 이 여자를 사탄이 무려 열여덟 해 동안이나 묶어 놓았는데, 안식일일지라도 그 속박에서 풀어주어야 하지 않느냐?”
그러자 예수님의 적대자들은 모두 망신당하고 군중은 그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두고 기뻐하였습니다. 
이렇게 오늘 복음은 회당에서 회당장과 설교로 대결을 벌이는 구도이고 결국 예수님께서 승리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설교는 설득적이었고 회당장의 설교는 말 그대로 설교에 그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설교는 무엇이 다를까요? 바로 구체적인 비유를 들어 설명하신다는 게 다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예수님께서 비유를 통하지 않고서는 말씀하지 않으셨다는 구절을 너무도 쉽게 간과합니다. 그러나 비유가 없으면 그 설교는 설득력을 잃습니다. 

제러드 포글은 대학교 3학년 당시 몸무게가 192킬로그램에 달했고 ‘커다란 사람들을 위한 옷가게’에서만 구할 수 있는 가장 큰 사이즈인 XXXXXXL의 셔츠를 입었습니다. 바지의 허리 치수는 60인치나 되었습니다. 
재러드의 아버지는 인디애나폴리스의 의사였는데, 벌써 몇 년째 아들에게 몸무게에 관해 경고했지만, 아무런 효과도 거두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병원에서 부종을 앓고 있다는 진단을 받고는 몸무게를 줄이기로 결심합니다. 당시 서브웨이 샌드위치는 “서브웨이 샌드위치 일곱 개에 함유된 지방은 도합 6그램도 안 됩니다”라고 홍보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재러드는 선브웨이 샌드위치를 먹으며 다이어트를 해 보기로 합니다. 점심으로는 야채 서브 샌드위치를 먹고, 저녁으로는 6인치짜리 터키 샌드위치를 먹었습니다. 
이렇게 ‘서브웨이 다이어트’를 시작한 지 3개월 후, 그는 처음으로 저울 위에 올라섰고 무려 50킬로그램이 빠진 150킬로가 되었습니다. 나중에 80킬로그램까지 빠집니다. 이 사실을 알아낸 광고 회사는 ‘지금 우리 손 안에 엄청난 스토리가 굴러들어왔어!’라며 기뻐하였습니다. 그러나 광고 회사 사장의 제안에 본사 마케팅부장은 시큰둥하였습니다. 마케팅부장은 샌드위치는 맛으로 경쟁해야지 몸에 좋다고 말해봐야 소용없다는 견해이었습니다. 그러나 광고 회사는 공짜로 이 광고를 만들어주겠다는 제안과 샌드위치를 먹는 것이 전부가 아닌 운동과 의사의 지도가 있어야 한다는 문구를 넣는다는 끈질긴 설득으로 재러드의 사연을 광고로 내기로 합니다. 결과는 어땠을까요? 초대박이었습니다. 『스틱』이라는 책에 소개된 사연입니다. 

스토리는 정말 엄청난 힘을 발휘합니다. 책 『스틱』에는 설득력 있는 표현을 하는 여섯 가지 방법이 나와 있습니다. 단순해야 하고 의외성이 있어야 하며 구체적이어야 하고 믿을 수 있어야 하며 감정을 건드려야 하고 스토리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여섯 가지 조건을 다 채우는 것이 비유입니다. 예수님은 비유 말씀을 통해 이 여섯 가지 딱 달라붙는 메시지를 전달할 줄 아셨습니다. 그래서 비유를 통하지 않고는 말씀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얼마 전에 어떤 분이 누군가와 싸우고 미워하고 한 것에 대해 말했습니다. 저는 용서하라기보다는 비유를 통해 말씀드렸습니다. 
“바다의 수심에 따라 물고기가 사는 종류가 다른 것을 아시죠? 만약 내가 어떤 물고기와 문제가 있다면 나는 그 수심에 있는 것입니다. 같은 수준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부의 그물에 걸린 물고기들입니다. 그러면 더는 바다의 물고기들에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싸우면 같은 수준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쉽게 이해하였습니다. 상대가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의 비유를 들어주는 것은 내가 그 수준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합니다. 비유를 들 수 있다는 말은 다른 수준에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만이 하느님 나라를 체험하셨기에 그것에 대한 설명은 이 지상의 비유로만 표현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말이 단순한 설교가 아닌 설득이 되기 위해 우리도 비유를 통하지 않고서는 말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