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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삼용 요셉 신부님 | 나쁜 재료를 주며 좋은 물건으로 돌려받기를 바란다면?, 연중 제24주간, 2023 09 19

松竹/김철이 2023. 9. 19. 07:10

[나쁜 재료를 주며 좋은 물건으로 돌려받기를 바란다면?] 전삼용 요셉 신부님, 연중 제24주간, 2023 09 19

(클릭):https://www.youtube.com/watch?v=VUSOKg2w5-0

 

 

 

2023년 가해 연중 제24주간 화요일 – 나쁜 재료를 주며 좋은 물건으로 돌려받기를 바란다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나인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려주십니다. 복음만 읽어보면 마치 예수님께서 과부와 그 죽은 아들이 불쌍해서 과부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를 살려주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러면 왜 불쌍하게 죽는 이들은 모두 살려주시지 않으실까요? 예수님은 여인의 믿음도 보신 것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어디에서도 기적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받을 마음이 없는데 선물을 주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 어머니의 믿음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 것 같지만 예수님의 이 말에 어머니의 큰 믿음이 들어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그러자 죽은 이가 일어나 앉아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셨다.’”
“돌려주셨다”라는 말 안에는 어머니가 예수님께 먼저 “맡겨드렸다”, 혹은 “봉헌하였다”라는 말이 전제됩니다. 맡겨드렸다는 말은 어머니의 능력으로는 안 되기에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할 줄 알았다는 것입니다. 나인의 과부는 자신의 한계를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한계를 아는 사람은 맡길 줄 압니다.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없어서 하느님께 맡기는 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맡긴다는 말은 ‘죽여서 봉헌한다’라는 뜻과 같습니다. 

부모가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는 이유는 자기 능력으로는 한계가 있기 때문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이를 죽여서 맡기지 않고 살려서 맡기는 게 문제입니다. 그런 상태로 어떻게 교육이 이루어지고 변화될 수 있을까요? 
요즘 선생님 신자들에게 엄마들 때문에 너무 힘들어서 학교 그만두고 싶다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사연도 있습니다. 어떤 엄마가 선생님에게 보낸 문자입니다. 
“선생님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만, 제가 곰곰이 생각 좀 하다가 말씀드리는 건데요. ‘도덕책을 안 가져온 사람은 수업 시간 내내 서 있게 한다’라고 아이가 말하더라고요. ‘엄마 근데 나 도덕책을 잃어버렸어.’ 그날 밤 아이는 경기를 일으켰는데, 경찰서에 문의해보니 아동학대라고 하는데, 편법으로 아이들을 조지시면 편법으로 선생님을 조질 수 있다는 것만 기억해 주시겠어요 ^^”
선생님은 이렇게 답변하였습니다. 
“어머님 제가 오늘 아이들에게 확인해 보았는데요. 제가 도덕책을 안 가져온 사람은 수업 시간에 서 있어야 한다는 말을 한 적은 없습니다.”
이런 엄마들은 아이들이 이상해지는 것을 선생님 탓을 합니다. 그러나 아이들을 맡기지 않는데 어떻게 좋은 교육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얼마 전에 서울 서초구의 한 초등학교에서 20대 교사가 안타까운 선택을 한 적이 있습니다. 아이에게 구타당해도 선생님은 저항할 수 없습니다. “왜 우리 편이 없어? 교사가 죽었는데!”라고 울부짖는 동료 교사의 말은 ‘이게 제대로 된 교육일까?’라고 생각하게 합니다. 그런데 심지어 동료 교사의 죽음을 애도하는 프로필 사진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학부모도 있었습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이른 아침에 죄송합니다. 다름이 아니고 선생님의 프로필 사진이 학생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아이들 어린데 선생님의 행동 하나하나가 다 큰 영향을 준다는 거 아시죠? 아직 사실관계도 판명 나지 않은 일로 이렇게 추모한다는 걸 드러내는 건 아닌 것 같아 연락드립니다. 아이들이 상처받을 수 있으니 언급 자제 부탁드려요.”
이 댓글 때문에 파문이 일자 또 이러한 댓글이 달렸습니다. 
“선생님 제 문자를 여기서 볼 줄 몰랐어요. 너무 당황스럽네요. 개인적인 문자 내용을 유포하셨으니 각오는 되신 거죠? 학부모 회의안건으로 올릴게요. 너무 치욕스럽네요.”
어머니들이 이렇게 교육을 잘할 줄 안다면 왜 학교에 보내는 걸까요? 본인이 하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애 아빠가 지금 참고 있어요. 내가 말렸어요!”라는 등으로 협박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어머니들이 아이들의 교육에 대해 선생님들보다 더 잘 안다고 하는 교만 때문입니다. 여러 교육 프로그램을 많이 보기 때문입니다. 어떤 아이들에 대한 어머니와 선생님들을 위한 솔루션에서 “실제의 실천적인 변화가 오는 데에는 어떤 방법이 좋을까요?”라는 질문에 어느 유명 교육 전문가는 이렇게 대답해 주었습니다. 
“아이들의 마음을 읽어주세요.”
예를 들어 놀이터에서 줄을 서지 않고 먼저 타려다가 다치면 엄마는 왜 자기 아이가 줄을 서지 않게 키웠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어머니들은 선생님들에게 이런 말을 많이 한다고 합니다. 
“우리 애 마음 얼마나 읽어주셨어요?”
교육은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변화시키게 만들려면 맡겨야 합니다. 맡긴다는 말은 봉헌한다는 말입니다. 봉헌한다는 말은 죽인다는 뜻입니다. 
요즘에는 다시 스마트폰도 빼앗을 수 있고 아이를 돌려보낼 수도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아주 정상적으로 나아가는 것 같습니다. 선생님을 믿지 못하면서 자녀를 맡긴다는 말은 학교 교육으로 내 자녀가 변화되기를 원치 않는다는 말과 같습니다. 변화시키고 싶다면 맡겨야 합니다. 

『하.사.시.』 5권 25장 ‘코라진의 몸이 굽은 여인’에 나오는 예수님께서 해 주신 예화를 그대로 옮겨볼까 합니다. 
어리석은 어떤 부자가 한 장인(匠人)에게 아주 질이 좋은 꿀과 같은 황금색 재료의 큰 덩어리를 가지고 와서, 그것을 가공해서 장식된 작은 병을 하나 만들어 달라고 명령했습니다. ‘이 재료는 가공하기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하고 장인이 부자에게 말했습니다. ‘보세요. 이 재료는 무르고 잘 늘어납니다. 제가 어떻게 이것을 조각해서 모양을 만들 수 있겠습니까?’
“뭐라고요? 이 재료가 좋지 않다고요? 이것은 값진 수지(樹脂)이고, 내 친구 한 사람은 이것으로 만든 작은 항아리를 하나 가졌는데, 그 항아리에 넣은 포도주는 얻기 어려운 맛을 얻게 되오. 나는 더 큰 항아리 만들어 가져서, 그의 항아리를 자랑하는 내 친구의 자존심을 꺾어 주려고 이 재료를 아주 비싼 값을 주고 샀소. 항아리를 만들어주시오. 그것도 즉시. 그렇지 않으면 당신이 능력 없는 장인이라는 말을 하겠소.”
“그러나 손님 친구의 항아리는 황금빛 설화석고(雪花石膏)로 만든 것이 아닐까요?”
“아니오, 이 재료로 만든 거요.”
“질이 좋은 호박으로 만든 것이 아닐까요?”
“아니오, 이 재료로 만든 거요.”
“혹 같은 재료로 만든 것이라고 해둡시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흐른 결과로나 단단하게 만든 다른 재료들과 섞어서 치밀해지고 단단해졌을 것입니다. 그 친구분에게 가서 물어보십시오, 그리고 다시 오셔서 그분의 항아리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아니오. 이 재료는 그 친구 자신이 내게 판 것이고, 그렇게 써야 한다고 확실히 말해 준 거요.”
“그러면 그 친구분이 자신의 아름다운 항아리에 대해 손님이 가지시는 욕망을 벌하려고 손님을 속인 것입니다.”
“말조심하시오! 일을 하오. 그렇지 않으면, 이 희귀한 수지(樹脂)의 가치와 비교할 만한 가치가 없는 이 작업장을 빼앗아서 당신을 벌하겠소.”
“장인은 슬퍼하며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그것으로 반죽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반죽이 그의 손에 달라붙었습니다. 그는 유향(乳香)과 가루를 써서 한 덩어리를 굳게 하려고 해보았습니다. 그러나 수지는 황금빛의 투명성을 잃었습니다. 그는 그것을 열로 단단하게 하기를 바라면서 도가니 가까이 가져갔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용해(溶解)되기 때문에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면서 그것을 꺼내야 했습니다. 그는 사람을 헤르몬산 꼭대기에 보내서 얼어붙은 눈을 가져오게 해서 그 물질을 눈 속에 집어넣었습니다. 그 물질은 단단해지고 아름다워졌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성형(成形)이 되지 않았습니다. ‘끌로 모양을 만들어야지’ 하고 그는 말했습니다. 그러나 끌을 대자마자 수지가 산산조각이 낮습니다.
장인은 완전히 실망하고, 벌써 그 재료를 가공할 수 있게 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확신하고 마지막 시도를 해보았습니다. 그는 조각들을 주워서 화덕의 열기로 다시 액체가 되게 한 다음, 그것을 다시 눈으로 가볍게 얼렸습니다. 그리고 가까스로 말랑말랑해진 재료를 끌과 칼 모양의 주걱으로 가공해 보았습니다. 그 재료가 성형되기는 했습니다. 암! 성형됐지요! 그러나 끌과 혀 모양의 주걱을 떼자마자, 마치 반죽 통에서 부풀어 오른 빵 반죽인 것처럼 처음 형태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그 사람은 자기가 쳤다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부자의 보복을 피하고 파산을 면하기 위해서 밤사이에 아내와 아이들을 마차에 태우고, 물건들과 일하는 연장들을 싣고, 빈 채로 남겨둔 작업장 한가운데에 수지의 황금 빛나는 재료를 놓아두고, 그 위에는 ‘가공할 수 없음’이라는 쪽지를 남기고, 국경 밖으로 도망쳤습니다.

살아 있는 것을 주면서 변화를 기대하지 마십시오. 맡기려면 완전히 맡기십시오. 완전히 맡겼다는 말은 죽이 되건 밥이 되건 믿는다는 말입니다. 사제에게 성당을 맡겼는데 교구가 사제가 아닌 신자들의 목소리에 휘둘리면 어떨까요? 사제는 그 성당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게 됩니다. 사제가 봉사자를 뽑았다면 그 봉사자가 자신의 범주 안에서는 하고 싶은 일은 다 하도록 해야 합니다. 책임은 그 봉사자를 뽑은 사제에게 있습니다. 물론 사고도 발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맡기려면 제대로 맡겨야 합니다. 그래야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봉헌하여 좋은 것으로 돌려받으려면 죽은 제물을 바쳐야 함을 잊지 맙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