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꿀샘

정호 빈첸시오 신부님|20230402 오늘의 말씀

松竹/김철이 2023. 4. 2. 18:38

정호 빈첸시오 신부님|20230402 오늘의 말씀

(클릭):https://www.youtube.com/watch?v=1o6oMcKY0nA

 

 

 

천주교 부산교구 장산성당 주님 수난 성지주일 오늘의 말씀입니다.

 

 

저분은 갈릴래아 나자렛 출신 예언자 예수님이시오.”

 

한 사람이 모든 사람들의 추앙을 받거나 위인이 되면 그의 모든 것은 삽시간에 모두 의미가 있는 것으로 바뀌어 버립니다. 오늘 우리 주님의 거룩한 한 주간이 시작되는 미사를 봉헌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의 시작은 주님이 아버지의 집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 장면부터입니다.

 

주님께서 필요하시답니다.”

 

주님은 당신의 마지막이 아버지의 집에서 이루어질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나름의 준비를 하시고자 제자들을 시켜 나귀들을 준비시키십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 위에 오르시어 행렬을 시작하십니다. 누군가에겐 메시아의 행렬이고, 또 누군가에게는 죽음의 길일 수도 있는 주님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백성들은 한결 같이 푸른 잎을 들고 그분의 길을 마중합니다.

 

다윗의 자손께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 지극히 높은 곳에 호산나!”

 

사람들의 환호성이 맞이들인 하느님의 사람 그리스도는 사람들의 기대 속의 메시아와는 참 많이 달랐습니다. 그분의 공생활을 그분의 길 위에서 한 번 생각해봅니다. 그분은 우리가 범접할 수 없는 권위를 지니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우리 모두가 알아들을 수 있는 가르침으로 참 삶의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권위를 지니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사람을 가리지 않으셨습니다. 누구도 내세우거나 이용하지 않으셨고, 언제나 당신이 앞서서 모두에게 모범이 되셨고, 부족한 이들에게 희망과 격려가 되셨습니다. 그분 곁에는 모자란 사람도 도움이나 용서를 받았고 언제나 희망이 가득했습니다. 그분이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십니다. 우리는 그분에게서 우리의 모자란 삶에도 희망을 얻게 됩니다. 그것이 우리가 믿는 하느님이심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분이 당신의 집으로 들어오십니다. 그것이 우리가 손을 들어 맞이하는 하느님입니다. 우리의 구세주는 그렇게 우리 모두의 사이를 걸어 우리가 바라는 그 많은 소망위로 우리 안으로 들어오십니다.

 

““저분은 갈릴래아 나자렛 출신 예언자 예수님이시오.””

 

사람들이 모두 기억하는 이민족의 땅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오시는 주님, 그래서 그분은 그 이름으로 십자가에 달리게 되시지만 오히려 우리는 그런 주님이 온 세상의 구세주가 되신 이유를 그 이름에서 발견합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예루살렘이든 나자렛이든 구원의 땅이라는 것을 예수님을 통해서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큰 소리로 외치시고 나서 숨을 거두셨다.”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신 주님. 당신을 위해 백성들이 수십년에 걸쳐 지어올린 거룩하고 장엄한 성전이었지만 주님은 결국 그곳에서 쫓겨나십니다. 그리고 성전 밖 모두가 보는 가운데 십자가에 돌아가시게 됩니다. 우리는 주님의 성전 입성을 기억하고 이내 미사에서 그분의 죽음의 기록들을 읽었습니다. 수난복음은 주님의 수난이라는 슬픔과 주님의 삶이었던 기쁜 소식의 복음이 이어진 서로 맞지 않은 제목의 기록입니다. 우리는 이 기록을 성주간에 두 차례 읽으며 주님 죽음의 순간에 일어났던 일들을 하나 하나 새겨 봅니다.

 

내가 예수님을 여러분에게 넘겨주면 나에게 무엇을 주실 작정입니까?”

 

모든 사건의 시작이요, 많은 사람들에게 주님 죽음의 이유로 지목받는 사람 유다 이스카리옷의 증언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사실 그의 선택은 스승과의 이별, 그리고 그 몫 정도를 셈한 것입니다. 실제로 주님의 죽음에 그의 증언은 단 하나도 채택되지 못합니다. 그는 몰랐던 주님의 목숨값을 그는 은전 서른 닢으로 셈합니다. 결국 그 조차 자신의 죽음의 가격이 되고 말지만 말입니다.

 

받아 먹어라. 이는 내 몸이다.”

 

그런 유다도 함께 했던 최후의 만찬, 주님만 아시는 당신의 죽음의 마지막 식사에서 주님은 당신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이 때부터 우리의 미사가 시작되었고 그 때 사람들로부터 우리는 생명의 빵을 먹으며 2천년을 살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눈에 보이는 하느님은 그렇게 우리 안에 자리를 잡으셨고, 신자들은 하느님과 함께 세상을 호흡하고 살아가는 중입니다. 세상은 주님의 죽음을 준비했지만 주님은 미리 당신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셨고, 죽음은 세상의 잔인함과 속내를 드러냈을 뿐 주님을 사라지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 과정이 수난복음에서 드러납니다. 오직 주님만 아시는 죽음이었지만, 주님은 지혜롭게 그 죽음을 이미 벗어나셨고, 육신의 사망선고 이전 당신의 또 다른 형제들을 만드시고, 그들의 발을 씻어 이것의 의미를 심어주셨습니다.

 

내 마음이 너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그리고 자리를 옮긴 곳에서 주님은 시련을 느끼기 시작하십니다. 사람들의 숨겨진 마음이 드러나고, 또 남겨질 이들이 당신으로 인해 고통을 받게 되리라는 것을 아셨기 때문에 밤을 새워 마지막 남은 시간을 기도하며 보내십니다. 우리가 주님의 기도하는 모습을 자세히 본 것은 이 부분이 거의 유일합니다.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

 

주님의 죽음의 순간 주님은 마치 버려진 듯한 말씀으로 마지막을 맞이하십니다. 하느님의 뜻을 지키고 살아가는 이가 죽임을 당하는 순간을 모두가 보게 하심은 무슨 의미일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그런 이들의 손해와 희생, 그리고 죽음에 이르는 사건들을 우리는 마주합니다.

 

억울하고 이유 없는 이 죽음에는 늘 가려진 곳에 있는 이들이 있습니다. 힘 없는 이들은 이 진리의 삶의 좌절을 경험하게 되지만 그것으로 인해 희망을 꺽어 버리고 세상 질서에 굴종하게 만들려고 하는 이들은 늘 이런 죽음을 계획합니다. 그 날 예수님을 죽인 이들의 시도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이 외침과 같은 사람들의 생각은 부활을 통해 완전히 뒤집히게 됩니다. 하느님의 뜻은 바로 이런 죽음의 주인공이었음을 하느님 아버지께서 보여주시는 사건이 부활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만약 죽음을 피하셨다면 우리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당신의 길을 빗겨나는 구세주를 보게 되었을 겁니다. 그리고 그분을 죽이려 하는 이들은 이중 삼중으로 주님을 비웃으며 우리를 계속 죄에 묶어 두었을 겁니다.

 

그러나 그 죽음을 피하지 않으신 주님은 이미 당신의 생명을 나눈 형제들이 있었고, 또 당신을 사랑하시는 아버지를 알고 계셨기에 죽음은 고통을 넘어선 다른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분의 죽음과 함께 하느님은 사람들의 행동에 경종을 울리십니다. 그 때 누군가는 그 순간을 이렇게 알아듣습니다.

 

참으로 이분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

 

일주일 동안 주님의 마지막 길을 함께 하는 우리 교우들은 주님과 함께 죽고 살아가는 소중한 시간을 복되게 보내길 기도합니다.

 

 

 

0:00 오늘의 복음 - 예루살렘 입성 복음

2:13 "저 분은 갈릴래아 나자렛 출신 예언자 예수님이시오."

5:06 "예수님께서는 다시 큰 소리로 외치시고 나서 숨을 거두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