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 발표작

어머니의 기도 상자/(수필)한비문학

松竹/김철이 2019. 9. 5. 16:39

어머니의 기도 상자

 

                                                        김철이


 어머니에겐 기도 상자가 있었다. 매일 한 가지의 제목으로 채워져 가던 기도 상자 속에는 어머니 혼자만이 무명의 대상자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대화법이 있었다. 곁으로 보기는 불심을 지닌 불교 신자 같았지만, 유년시절 나의 시각으로 느껴진 것은 똑 부러진 불교 신자라고만 단원 지어 말할 수 없었다. 그 이유는 어머니기도 지향을 받아주던 대상자가 석가모니 부처님뿐만 아니라 사람들 입을 통해 신이라 불리던 모든 존재였다는 것이다. 모정을 지녔고 슬하에 자식을 둔 세상 모든 어머니는 죄다 마찬가지겠지만, 날 낳아주신 내 어머니의 자식 향한 욕심은 유별나다는 표현 하나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했었다. 어머니를 모르는 이들은 집착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터, 그러나 어머니를 누구보다 잘 아는 나로서는 결코 집착은 아니었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집착과 사랑의 차이점이란 집착은 기다림이 곧 고통이지만, 사랑은 기다림이 곧 행복이라는 것이다. 그랬기에 어머니의 기도 상자 속은 자식들을 향한 사랑으로 채워져 갔다.

 


 어머니의 기도를 받아줄 존재의 대상자들은 하느님이 됐든 부처님이 됐든 어머니의 기도 지향으로 올라갔던 소망을 들어주지 않고는 버텨내지 못했을 것이다. 사랑이란 자기희생이므로 자식들을 위한 어머니의 지극정성 기원은 아무리 격의 높은 신이라 하여도 들어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남다른 어머니의 끈기와 기다림은 여기에서 제 능력을 백번 발휘되었다. 어머니의 기도 상자 속은 일 년을 하루같이 반복해서 이어져가는 기도 지향으로 채워져서 열 손가락 깨물어 아프지 않은 손가락 없다는 속담도 있지만, 기도지향 열에 아홉은 몸이 성지 못한 둘째 아들의 몫이었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는 속담에 걸맞은 것이 열여덟이란 꽃다운 나이에 가난한 철공소 기술자에게로 출가하신 어머니는 열아홉 살에 첫아들을 스물두 살에 둘째 아들을 낳아 조상 대대로 손이 귀했던 가문에 안겨드렸으나 누구의 복이 박복했었던지 불과 이삼 년 사이에 들면 꺼질세라 불면 날아갈세라 귀하디귀하게 여겼던 두 아들을 병마의 궂은 심술로 잃고 말았다는 것이었다.

 


 시대를 잘못 타고난 탓인지 나라가 힘이 없었던 탓인지 모를 일이지만, 일제 강점기시대에 태어난 어머니는 경상북도 경주에서 농사일은 부업이요 과수원과 큰 술도가를 주업으로 정해 일하셨던 외할아버지 슬하의 사 남 일여 중 고명딸로 부모님은 물론 위로는 오라버니 셋과 아래로는 하나인 남동생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랐다. 일제 강점기 시대에는 농부들이 갖은 피땀 다 흘려 지어놓은 농작물을 공출이라는 핑계 삼아 강제로 수탈해 갔으므로 아무리 대농의 농가라 하여도 보릿고개를 겪으며 하얗게 윤이 나는 쌀밥을 먹기란 극히 드물었다고 하는데 워낙 강단(斷)이 강하고 자기주장이 뚜렷하여 불의에 합의하지 않고 굽힐 줄 몰랐던 외할아버지 성품 덕에 일 년 삼백육십오일 기름진 논에서 추수한 쌀밥으로만 생활했었다. 보는 눈이 널려있으니 드러내놓고 하루 세끼니 쌀밥을 먹었던 것이 아니라 가을걷이 때 외가 가족이 일 년을 먹고 생활할 곡식은 외가 뒷마당에 큰 구덩이를 파고 큰 독을 묻어 독 속에 곡식을 채웠다는 것이다. 그 후에야 남은 곡식으로 일제 정부가 요구했던 공출을 받쳤던 것이다. 철없던 시절 어머니는 쌀밥 대신 잡곡이나 감자 고구마 등으로 하루 한두 끼니를 때우던 친구들이 부러워 그들이 식사대용으로 먹었던 것들과 쌀밥을 주고 바꿔먹었다는 웃지 못 할 우화도 있었단다. 

 


 어머니는 태평양 전쟁 일제 전쟁 수행 위하여 한국 젊은 미혼 여성 강제 동원한 종군 위안부() 근로 정신대()라는 어처구니없는 구실 하에 조선의 젊고 멀쩡한 처녀들을 강제로 끌고 갔던 그 올가미에서 벗어나려는 방안으로 결혼을 생각해 냈다는 것이다. 외가로 먼 친척뻘 되는 할머니의 중매로 편부슬하(偏父膝下)에 어렵게 생활하며 성장하신 아버지와 우여곡절 끝에 혼인하셨던 것이다. 호의호식하며 고생이란 모르고 성장 생활하셨던 어머니는 혼인 첫날부터 시시때때로 밀려드는 숱한 삶의 희로애락과 사투를 벌여야 했다. 장차 국내 최고의 기 공장(長)이 되는 포부를 지녔지만, 가진 것 별로 없었던 아버지는 그래도 경주에서 행세깨나 하던 가문의 고명딸을 아내로 맞아 분수에 맞는 행복한 가정을 꾸려 나아가리라 다짐하였으나 불행의 여신은 그 작은 행복마저 그냥 두고 보지 않았다. 혼인한 지 몇 개월 신혼의 생활조차 맛볼 새도 없이 먼 친척의 철공소에서 일하시던 아버지는 강제 징용에 끌려가셨고 시집 식구들과 채 정들기 전이라 낯설고 물선 부산 동구 범일동 다섯 가구가 이마를 맞대고 생활했던 적산가옥에서 어머니는 홀시아버지와 남편의 혈육이라고는 하나뿐인 시동생과 단칸방에서 남편 없는 시집살이가 시작된 것이다. 어머니의 기도 상자는 이즈음 만들어졌다고 했다. 이후 강제 징용에 끌려가 생사조차 모르는 남편의 무사 귀환을 위해 가슴속에 만들어진 기도 상자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채워져 갔다. 그 덕분인지 모르지만, 하늘을 뒤덮은 미국 전폭기에서 폭탄이 무수히 떨어졌던 일본 땅에서 구사일생으로 아버지는 상거지 꼴로 살아오셨다. 그 아픈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친정아버지 따르듯 했던 시아버지가 겨우 육십 고개 넘기던 해 하늘나라로 가셨고 시동생마저 북한의 불법 도발로 터진 6, 25동 난에 참전하게 되어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동생의 생사조차 몰라 반미치광이로 변해버린 남편을 지키며 어머니의 기도 상자는 하루하루 채워져 갔다. 어머니의 기도 덕분인지 하늘의 자비 덕분인지 시동생 또한 백마부대 몇 명 되지 않는 생존자에 끼게 된 것이다.

 

 중이 제 머리 깍지 못한다는 속설처럼 남편을 포함한 시댁 시구들을 위한 어머니의 기도 상자의 역할은 백번 발휘하여 채워갔으나 어머니 자식 향한 욕심이 너무 많아 그랬던지 모를 일이지만, 정작 당신 슬하의 자식들을 향한 기도 상자는 제대로 채우지 못하셨다며 일곱 살 철부지 아들에게 눈물로 고백하시던 그 모습 영영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어머니 가슴속 깊은 곳에 기도 상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내 나이 일곱 살 때였다. 무더운 여름날 두 살 아래의 누이동생은 제 발로 걸리고 뼈대 굵어 독 같은 나를 업고 저녁 삼보를 하시던 중 뜬금없이 등 뒤를 돌아다 보시며 “철아! 엄마 가슴속엔 기도 상자가 있데이 기도 상자? 오냐 기도 상자, 이 기도 상자는 내 평생 채우다가 못다 채우머 철이 니가 채워줘야 한데이” 아무런 영문도 모른 채 고개를 끄떡이며 어머니의 기도 상자를 물려받았으나 점차 자라면서 제 서러움에 기도 상자의 존재조차 까맣게 잊고 살았는데 내 나이 서른일곱 살 신앙을 알고부터 하느님, 부처님, 세상 모든 잡신에게로 향했던 어머니의 기도 상자가 나의 대에 와서 세상 유일신에게로 향하게 된 것이다. 세상 그 어떤 농사보다 자식 농사를 잘 지어야 하는데 당신은 당신 부덕의 소치로 자식 농사는 잘못 지었다며 탄식하시던 그 모습 여태 눈앞에 선하다. 어머니는 평생을 홀로 가슴속의 기도 상자를 채워가며 슬하에 사 남 일녀를 두셨으나 맨 위로 아들 둘을 천하에 몹쓸 병마에 잃었고 막내아들마저 병마의 농간으로 평생을 장애의 멍에를 씌우게 되었다. 아버지 살아생전 늘 말씀하셨다. 귀한 가문의 고명딸을 데려와서 손 귀한 가문에 아들 넷을 낳아주었으나 당신 덕이 부족해서 지켜주지 못했다고 넋두리하시던 그 모습이 가슴 시리게 한다.

 


내 나이 육십 고개 용케도 살았지. 비록 사대육신 의지대로 움직일 수 없으나 큰 탈 없이 여태 살았으니 이 또한 내 인생 수지맞은 장사가 아닌가. 이 모두 칠십 평생 살다 가신 어머니의 기도 상자 속에든 기도 지향 덕분이라 여긴다. 어머니 일찍이 내게 물려주신 기도 상자 속에는 어떤 지향들이 들어있는지 열어볼 열쇠가 없으니 이다음 하늘나라 가는 날, 어머니 영전에 여쭤볼 참이다. 대를 물려 이어받은 기도 상자를 알차게 채워 가야 할 소명이 내게 있으니 남은 인생 더욱 알차게 살아 세상에 둘도 없는 기도 상자 가득히 채워가야지. 못다 채운 어머니 몫까지 어느 한 곳 빈틈없이 다 채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