松竹♡수필

그 집 앞

松竹/김철이 2016. 3. 4. 10:04

그 집 앞

 


 사람들이 생활하는 환경 중에 대자연이 주는 혜택이 제일이라 하였다. 일기 조건을 볼 때 햇살이 잘 들고 통풍이 잘되는 집에 거주하며 생활하는 이들은 건강하고 늘 쾌적한 기분으로 생활할 수 있을 것이다. 예로부터 어른들 입을 통해 전해 내려오는 말에 3대가 적선을 해야 남향집에 살 수가 있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의 뜻은 사람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 일기 조건은 불가피한 것이고 태양열도 지나치게 받으면 좋지 않지만 건강하게 살려면 적당한 햇살을 쪼여야 하는데 사람이 태어나고 돌아갈 때의 터전은 가정이자 집 인지라 사람이 살아갈 집은 그만큼 소중한 것이 이에 옛 어른들은 집을 짓거나 살 때에 하루 중 햇살이 잘 들고 통풍이 잘되는 남향집을 선호하곤 한다. 그런데 남향집을 짓거나 사서 생활하는 것도 우연이나 본인들의 생각과 의지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자손 3대에 걸쳐 남에게 자선을 베풀거나 선행을 해야 대자연으로부터 남향집을 얻어 생활할 수 있다고 믿어 전해 내려온 말이다.

 


 그 집 앞에는 날씨가 흐리거나 비가 오지 않은 한 1년 365일 날이면 날마다 하루의 첫 길손으로 따스한 햇볕이 습관처럼 방문하곤 하였다. 또한, 세상 어느 길손보다 반가운 손님은 걸인들이었는데 민족의 큰 상처로 남아버린 6, 25 한국동란이 휴전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으로 연출이 누군지 주연이 누군지 모르는 상태에서 3년이란 대단원의 막을 내린 지 몇 년 되지 않았던 터라 국민의 살림살이가 거의 바닥을 헤매고 있을 시점인지라 얻어먹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얻어먹는 사람들이 워낙 많았던 시절이었기에 얻어먹는 사람들과 자선을 베푸는 사람들 사이에 실랑이가 종종 일어나곤 하였다. 생각의 차이겠지만, 개인의 처지에서 볼 때 얻어먹는 사람은 한 사람에 불과하나 자선하는 사람으로선 하루에도 몇 사람씩 많은 날이면 열 명이 넘는 걸인들이 다녀가곤 하니 자선을 하는 이들 처지에서도 짜증이 나는 것도 무리라 말할 수 없는 일이었다.



 온 국민의 살림이 너, 나 할 것 없이 이렇게 어려울 시점인데도 그 집의 안 주인이신 내 어머니께선 자선이란 부유하고 많이 가졌을 때 행하는 것이 아니라 부족하고 덜 가졌을 때 나누는 것이 참 자선이고 참선행위라 하시며 매일같이 찾아오는 수많은 걸인을 결코 박대하는 일이 없었다. 반면에 넉넉한 형편인데도 더 가지고 싶어 걸인 행세를 하고 다니며 어른들이 외출하고 잠시 집을 비운 집을 골라 어린아이들을 협박하여 현금이나 현품 등을 강제로 빼앗아 가는 몰지각한 자들이 실존하였고 그런 사례가 그 집 주위에서 종종 일어나는 사건이었기에 어머니께선 그런 자는 절대 용납하지 못한다시며 단단히 벼루고 게시던 차에 내가 일곱 살 때의 일인데 하루는 어머니께서 나와 두 살 아래의 누이동생만 집에 두고 잠시 외출을 하셨는데, 마치 그 틈을 노리고 있다 찾아온 것처럼 얻어먹는 사람이라곤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의 깔끔한 옷차림의 60대 초반으로 느껴지는 노인 한 분이 찾아와 자식도 없는 불쌍한 영감이 배가 고파 동냥을 왔으니 쌀이라도 조금만 보태달라는 것이었다. 나와 누이는 집에 어른이 아무도 안 계시니 안된다고 말하자 집안에 어른이 계시지 않음을 확인이라도 했다는 듯이 집고 있던 지팡이로 어린 누이를 심하게 겁을 주고 위협을 하여 네 말 정도 들어가는 쌀 뒤 지에 들어있던 쌀을 거의 다 강제로 빼앗아 가버렸다. 그 탓에 죄 없는 누이는 귀가하신 어머니께 호되게 야단을 맞았으며 훗날 같은 동네에 동냥을 나왔던 그 노인은 어머니의 눈에 띄어 불같은 어머니 성미에 그냥 계실리 만무한 일이었고 빌어먹어도 기본 양심은 버리지 말라는 어머니 말씀에 코도 한번 홀짝 못한 채 꽁지가 빠지라 달아나 버렸다. 그 뒤로는 내가 살았던 동네에서 그 노인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정확한 풍문에 의하면 그 노인에겐 건장 같은 아들, 딸들이 여럿 있고 가정형편도 그 시대의 서민층에 비해 여유롭고 넉넉한 편인데도 동냥하러 다니는 것은 젊은 시절부터 해왔던 도박을 끊지 못했으며 자녀나 부인에게 노름 밑천을 타내기 어렵자 그런 몰지각한 행위를 계속해서 이어왔다는 것이었다.

 


 그 집과 내가 연을 맺은 것은 세상에 온 지세 살 때인 1956년 시월이었다. 부산 동구 범일동 산동네에서 태어난 나는 두 살 때 부모님의 등에 업혀 그 집과 같은 연산동에 있는 당시 철도원들에게만 특별 혜택으로 부여된다던 철도관사 뒷방으로 오게 되었다. 그 철도관사 뒷방의 주인은 아버님과 같은 철도원이셨지만, 소속이 다른 한 아저씨의 집이었는데 그 아저씨와 아버님은 평소에 친분이 있었으며 아버님께선 그 아저씨 댁에 얼마간 세 들어 살면서 당시 꿈이셨던 철도관사를 배당받으려 하셨다는 것이었다. 그 철도관사 뒷방은 좁은 것은 둘째이고 창문과 출입문인 현관문이 북쪽으로 나 있었기에 종일 있어봐야 밝고 따스한 햇볕 한 점 볼 수 없을 정도로 어둡고 습도가 높은 방이었다. 그래도 다행이었던 것은 그 댁과는 전부터 친분이 있었고 어머니와 장녀의 이름을 붙여 영숙이 엄마라고 불렀던 그 댁 아주머니의 사이가 서로의 입속에 밥을 꺼내어 먹을 정도로 가까워졌기에 아버님과 그 댁 아저씨께서 출근하고 계시지 않는 낮에는 거의 종일 햇살을 볼 수 있는 철도관사에서 가장 큰 방과 우리 가족이 살았던 뒷방 사이에 미닫이문이 네 짝이 있었는데 그 네 짝의 미닫이문을 영숙 아주머니께서 다 열어주셨던 덕분에 햇살을 구경할 수 있었다. 그 어둠 침침한 골방에서 두 살 아래인 누이를 보게 되었고 한 달 사이로 영숙 아주머니도 둘째 딸을 낳게 되셨는데 한 지붕 아래서 태어난 두 사람의 우정은 같은 동네에서 자라면서도 한 번도 다투지 않는 특별한 우정이었고 두 사람 사이의 그 우정은 이미 50년이 넘는 세월을 살아버려 반백이 된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영숙 아주머니 뒷방에서 1년을 살면서 어머니께선 입버릇처럼 속으로 돼 내였던 단어가 있었다고 하셨다. 그것은 우리 삼 남매에게 햇살이 잘 들고 양지바른 집에서 살게 해 주고 싶으니 하늘을 다스리는 신이나 땅을 다스리는 신이 존재한다면 어리석고 욕심 많은 이 아낙의 소망 들어주십사 하는 기원이었다고 한다. 어머니 혼자만의 신앙이 되어버린 그 축원마저 외면할 수 없었던지 비록 부모님 가슴에 대못을 박아 영원히 치유 불가능한 상처를 주었고 잘못된 세상 역사의 제물로 기억 속에 퇴색되어 버렸지만, 하늘은 어머니의 기도를 들어주었고 마침내 내가 세 살이 되던 해 늦가을 그 집으로 이사하여 우리 가족들만의 새 보금자리를 이루게 되었다. 꿈길에도 못 잊어 그리워했던 그 집, 우리 가족이 살 새 둥지는 다른 사람의 손을 빌리지 않고 두 분이 손수 가꾸고 다듬고 싶었던 부모님은 어느 한 곳 손질하지 않고 생활할 수 없었던 그 집 안팎을 모래, 시멘트, 전기 등을 만지고 다루느라 손발이 터서 피가 흘러 딱지가 앉는 것은 예사였다. 그 집 한 채를 집다운 집으로 꾸미는 데 있어 부모님의 노고는 몇 곱절이 필요로 했는지는 가까운 이웃들이나 가끔 나들이 삼아 다녀가셨던 멀고 가까운 친지들의 입을 통해 증명해 주었다. 그 예로 그 당시 이웃에 남편이 일찌감치 세상을 떠나고 홀로 머리에 이고 다니는 행상으로 슬하의 4남매를 기르시던 할머니라고 하기엔 조금 젊으신 50대 초반의 아낙이 3일에 한 번꼴은 우리 집에 들르곤 했었는데, 어머니께서 얼마나 그 집을 애지중지 하시며 가꾸고 닦으셨던지 형님의 이름을 부르며 “아이고야! 돌네는 언제 봐도 너무 짭질 맞아서 변소에 떨어진 밥알도 주워 먹어도 되겠다. 아이가…”라는 극찬을 아끼지 못할 정도로 어머니는 그 집 안팎에다 혼을 쏟았었다.

 


 부모님의 혼이 서려 있는 그 집 안팎에다 5, 16 군사혁명이 일어나기 전 3년여에 걸쳐 아버지와 어머니는 열성을 다하여 아름답게 가꾸고 꾸며 가셨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고 이미 반백을 살아버려 퇴색된 추억 속에 아련히 남아 꽃피는 모습은 30여 평 되는 화단인데 비가 내리는 날을 제외하곤 온종일 햇살이 내리쬐던 화단에는 1년 열두 달 동안 꽃이 질 줄 몰랐다고 표현하여도 틀리지 않는 표기법일 것이다. 부모님께서 이 화단을 꾸미기로 하셨던 근본적인 이유는 나 때문이셨다. 1년 열두 달 누구의 도움이 없이는 바깥 구경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할 둘째 아들을 위해 화단을 꾸며 대자연과 대화하게 해 주자는 의도 셨다. 단감나무를 심어 풍요로운 가을을 보며 마음을 키워가라 하셨다. 또한, 혹한으로 세상 온갖 생명체 휴식에 들어가는 겨울철에는 쑥국 화를 심어 마음의 평화를 누리게 하셨고 노란 수선화를 심어 사랑에 보답하는 법을 가르쳐 주셨으며 애초와 무궁화 나무를 심어 젊은 시절의 고뇌와 애국심을 생각게 해 주셨다. 한 해의 봄이 시작되는 3월에는 그 당시 구하기조차 어려웠던 아몬드를 꽃을 피우게 하여 희망을 느끼게 하셨고 4월에는 나팔꽃을 심어 마냥 넘치는 기쁨을 향해 줄기를 타고 오르는 잉크빛 나팔꽃 교훈을 스스로 깨달을 수 있게 해 주셨으며 계절의 여왕 5월에는 민들레를 심어 어떤 시련과 고난이 오더라도 늘 천진난만하게 살라시는 무언의 교훈을 가슴에 새기도록 해 주셨다. 여름이 시작되어 불볕더위의 계절로 치닫는 6월에는 그 당시로선 구하기도 어려웠겠지만 이름조차 생소한 버베나 풀꽃을 피게 하여 가족의 화합을 가르치셨고 7월에는 해바라기와 초롱꽃을 피게 하여 보모, 형제나 사랑하는 이에게 거리낌 없이 사랑을 고백하며 애모하는 마음이 자라게 해 주셨으며 8월에는 서양 보리수나무를 심어 부부애를 가르쳐 지금의 아내를 혼을 다해 사랑하며 백년해로하라는 교훈을 남겨주신 듯 느껴진다.

 


 특히 지금도 잊지 못할 기억 중 하나는 아버지께서 사용하셨던 공구나 연장, 그리고 생활에 필요한 생활도구들을 넣어두었던 비교적 큰 창고가 화단 한 켠에 있었는데 그 창고 옆에다 청포도 나무를 심어놓고 담장 삼아 쳐두었던 철조망을 따라 포도 넝쿨이 올라가게 해 놓은 다음 포도 넝쿨 아래 평상을 짜서 깔아 놓고 불볕더위가 극성을 부리는 한여름을 피해 시원한 가을바람을 꿈꾸었던 일과 한겨울이면 혹한을 피해 피신 온 열대 선인장들로 가득 찼던 다다미방 창을 열어 손만 대어도 “톡! 하고 터질 듯 빨갛게 잘 익은 앵두를 따 먹으려다 미처 철수하지 못한 선인장 가시에 찔려 아파했던 기억이 아름답기 그지없는 추억으로 다가선다. 역사의 제물로 헌납한 채 그 집을 떠나기 전날 밤새 단잠을 이루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시던 부모님을 지켜볼 땐 철부지 어린 가슴에도 피멍이 들어 40년이 훨씬 지난 오늘날까지 가시지 않은 듯싶고 가정의 달 5월을 맞이하며 내게 다 내어주셨던 내 부모님께 난 무얼 해 드렸나를 떠올리며 늦깎이로 가정을 이루어 사랑하는 아내와 두 번째 둥지로 이사하여 생활하기 부족함이 하나 없는 지금도 내 영혼은 늘 양지발랐던 그 집 앞을 서성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