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대간 소통

말씀의 이삭 | 무명 순교자를 위한 진혼곡

松竹/김철이 2025. 4. 1. 12:05


무명 순교자를 위한 진혼곡

 

 

매화가 꽃망울을 터뜨리는 봄날! 그 향기가 순교자들 을 향해 퍼져갑니다. 열두 차례에 걸친 항암 치료가 끝날 무렵, 전주의 첫 순교자 권상연을 기념하는 성당의 모든 성물과 성화를 맡아달라는 의뢰가 들어왔습니다. 지극정 성으로 저를 살린 둘째 아이가 엄마의 건강을 염려하며 작업을 의뢰하신 신부님을 못마땅하게 여겼지요. 저 역시 후유증으로 여전히 힘든 상태에서 방대한 프로젝트를 감 당할 수 있을지 걱정스러웠지만 작가로서 소중한 행운을 놓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스테인드글라스, 순교자상, 성모상, 십자가, 14처, 감 실, 문손잡이에 이르기까지 무엇에 홀린 듯 작업하다 보 니 1년 반의 시간이 지나갔습니다. 평소에 그려 놓은 묵 주기도 그림, 예수님의 일대기 테라코타 작업, 성전 입구 의 천지창조 그림들도 마치 예비한 듯 제자리를 찾아갔습 니다. 돌이켜보니, 일련의 작업은 아픔을 통해 순교자들 의 뼈아픈 고통 속으로 저를 초대해 주신 주님의 선물이 었습니다.

 

무수한 작품 가운데 가장 가슴에 파고들었던 것은 4미 터에 가까운 대형 십자가상입니다. 나의 죄가 파먹은 예 수님의 몸, 탈골된 뼈, 꺾인 목, 골수까지 박힌 가시관! 지 금까지 수없이 만든 십자고상과는 달리 절체절명의 고통 속에서 만난 주님의 모습입니다. 정말 상상하기 힘든 땀 과 기도와 희생이 산을 이루어 권상연성당이 탄생하였습 니다.

 

겨우 숨을 돌리고 지내던 어느 날 절두산 순교성지의 한국천주교순교자박물관에서 전시회에 초대해 주셨습니 다. 절두산 성지에서 8천 명이나 되는 무명 순교자들의 목이 잘려 한강에 던져졌다는 신부님의 말씀을 듣는 순 간, 가슴이 따가울 정도로 저렸습니다. 땅속 깊은 곳까지 적신 순교자들의 핏방울이 제 몸으로 스며드는 것 같았습 니다. 짙은 아픔의 터널을 지나온 저에게 던져진 주제를 안고 화실 앞 커다란 비움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어떻게 하면 그분들께 마음을 다해 위로의 그림을 바칠 수 있을 까 묵상했습니다. 쟁반에 놓인, 잘려 나간 순교자의 머리 가 하느님을 향해 미소 지으며 평안히 잠들어 있는 모습, 하느님의 커다란 눈물방울 속에 잠긴 무명 순교자들, 죽 는 순간까지 함께 잡힌 가족에게 배교하지 말라며 당부하 던 순교 복자 이의송, 그 밖의 우리 아름다운 강산을 피로 물들인 순교자들의 절절한 행보를 곳곳에 담아 봅니다.

 

그분들이 모진 박해 속에서도 굳건한 믿음을 지킬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이었을까요? 주님과 깊은 만남이 있었 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전주의 첫 순교자에서 절두산 의 무명 순교자들까지 그리게 하신 주님의 섭리를 소명으 로 여기며 기쁘게 받습니다. 지금 제가 누리는 이 귀한 믿 음은 수없이 많은 순교자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이 최고 의 선물을 붙들고, 흔들림 없이 기쁘게 살아야 할 과제가 제게 주어진 것 같아 가슴 벅찰 따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