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제의 공간

외유내강(外柔內剛) | 김유강 시몬 신부님(풍양 농촌 선교 본당 주임)

松竹/김철이 2024. 9. 29. 17:20

외유내강(外柔內剛)

 

                                                        김유강 시몬 신부님(풍양 농촌 선교 본당 주임)

 

 

저는 사람의 생김새 모양이나 형태는 잘 기억하지만, 사람 이름은 잘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첫 만남에 수시로 여러 번 이름을 묻곤 하죠. 한번 들은 이름을 까먹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잘 되진 않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이름을 외울 때 그 사람의 특징이나 별명, 애칭으로 기억하려고 합니다. 휴대폰에 상대방 이름을 저장할 때에도 그때의 상황과, 그 사람의 별칭 등을 함께 사용하여 휴대폰에 저장하곤 하죠. 저와 같이 특별히 사람들 이름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들이 있으리라 생각하여, 상대방에게 저의 이름을 소개할 때 자주 쓰는 말로, 외유내강이라고 표현하곤 합니다. 물론 제 이름의 한자와는 다르지만요.

 

겉으로는 부드럽고 순한 태도를 보이나 마음속은 단단하고 굳센 의지를 지니고 있음을 뜻하는 사자성어로 외유내강(外柔內剛)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저 역시 겉으 로는 부드럽게 상대방을 대하면서도 속은 강한 의지의 소유자가 되고 싶습니다. 또한, 이 말은 오늘 복음의 예수님을 두고 하신 말씀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무리에 속하지 않은 사람이 스승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사람을 막았다는 요한의 옹졸 함에 대하여 예수께서는 “막지 마라.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마르 9,40)라며 외유(外柔)의 태도를 보이십니다.

 

오늘 복음뿐만 아니라, “어린이들을 그냥 놓아두어라.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 사실 하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마태 19,14)라며 어린이들에게도 외유(外柔)의 태도를 보이시기도 하셨고, 치유의 기적을 일으키시는 모습을 볼 때마다 언제나 너그러운 마음으로 사람들에게 부드러운 외유(外柔)의 태도를 보여 주셨습니다.

 

반면 예수님께서는 늘 유(柔) 하시지만은 않으셨습니다.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서로에게 죄를 짓게 만드는 사람과 실제로 죄를 짓게 하는 신체 일부에 대하여 예수님은 내강 (內剛)의 태도를 보이십니다. 그것도 소름이 끼칠 정도로 매우 단호하고 엄격한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남을 죄짓게 하는 사람은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낫다니, 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말씀입니까? 그뿐이 아닙니다. “손이 죄를 짓게 하면 그 손을 잘라버리고, 발이 죄를 짓게 하면 그 발을 잘라버리며, 눈이 죄를 짓게 하면 그 눈을 빼 던져 버려라”(마르 9,43~47)라는 말씀은 실로 엄청난 요구사항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만일 이 말씀을 우리가 그대로 따라야 한다면 우린 모두 벌써 장애인들이 되어 있어야 하겠네요. 그러니 오늘 말씀은 그만큼의 굳은 결단력을 가지고 죄지을 기회를 피하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손을 움직인 마음이 문제이지 손이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사실 우리는 사소한 죄들과 타협을 할 때가 많습니다. ‘이번 한 번만’, ‘이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라면서 죄의 유혹에 쉽게 쉽게 넘어가 버리는 우리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마음을 이렇게 강하게 하지 않으면 악은 우리의 마음을 흔들어놓아 죄 중의 상태를 익숙하게 만들어 버릴 것이고, 하느님의 뜻과 점점 멀어지게 만들 것입니다.

 

주일 미사를 한번 빠지기는 쉽지 않으나, 한번 빠지면 2번은 쉬워지고, 그러다 보면 냉담의 길로 쉽게 넘어가기 마련인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가 참된 신앙인다운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나의 뜻이 아닌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가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뜻 안에는 언제나 사랑이 있습니다. 우리 역시 적극적인 사랑의 실천을 하면서 살아가게 될 때 죄악을 피할 수 있는 든든하고 강한 내강 (內剛)의 마음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도 죄를 멀리하고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더욱 하느님과 가까이 다가가야 하겠습니다. 신앙인에게 사랑의 실천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조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