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하는 사람, 토마스
홍경완 메데리코 신부님(부산가톨릭대학교 총장)
의심하고 질문을 던지는 일은 인간의 것입니다. 인 간만이 질문을 던지며 그 까닭을 알고 싶어 합니다. 그 냥은 받아들이기 싫다는, 수용할 만한 충분한 근거를 찾고 싶다는 인간 의지의 강력한 표현이 질문을 던지 는 행위입니다. 믿음에 대해선 더욱 그렇습니다. 그렇 게 의심하면 불신앙이 더 커질 듯 보이지만, 실은 질문 을 통해 얻어낸 것들이 든든한 토대가 되어 제대로 된 신앙이 뿌리를 내리게 이끌어 줍니다.
신앙은 그 마지막 자리에선 어떤 의심이나 질문도 필 요 없는, 심지어 믿는다는 말조차 무의미한 *지복직관 의 순수가 자리하고 있을 터이지만, 그건 마지막에나 일어날 바라마지않는 일이고, 그리로 향하는 길 위에 서는 늘 ‘믿기 위해서 알아야 하고, 알기 위해서 믿어야’ 하는 작업이 반복되어야 합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 님이 가르치고 계시듯, 신앙과 지성, 믿음과 앎은 하느 님 진리를 향해 날아오르는 두 날개이기 때문입니다.
질문이 멈춰질 때 신앙은 쉬 맹신과 광신으로 전락 해 버리고 맙니다. 질문이 멈춰진 건강하지 못한 신앙 이 우리 사회에 얼마나 해로운지 신천지를 비롯한 유 사종교들은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건강하고자 하면 질문을 던져야 하고 물어보아야 합니다. 그런 점 에서 오늘 복음의 토마스 사도는 ‘불신앙의 대명사’가 아니라 ‘질문하는 신앙인의 표양’입니다.
토마스는 알고 싶었습니다. 부활이 무엇인지, 그게 어 떻게 가능한지, 어떻게 죽었다가 다시 살 수 있는지 를 알고 싶었습니다. 십자가와 죽음은 백주에 사람들 이 저지른 일이라 누구도 모를 수 없으나, 부활은 하느 님의 손으로 하신 일이기에 아무도 알 수 없었습니다.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은 이 질문의 끝에 나오는 황 홀하고도 찬란한 고백입니다. 질문하는 사람 토마스 는 난처한 질문을 통해 한 단계 너머로 도약합니다. 감 각적 지각을 넘어선 또 다른 앎이 있음을 온몸으로 체 득합니다. 질문 때문에 가능해진 도약이고, 질문으로 새롭게 열리게 된 지평입니다.
부활이 말해주는 신비는 예수님처럼 살면, 죽음도 죽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죽음을 죽이는 일이 가능하 다는 가르침, 그 엄청난 신비를 알게 되면 모든 것이 바뀝니다. 오늘 첫 독서가 그 변화를 이상적으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진정한 의미의 공동체가 가능해집니 다. 두 번째 독서가 말해주듯 부활은 고통 속에서도 기 뻐하고 즐거워하도록 인생관도 바꿔 놓습니다. 이게 부활입니다
“신앙을 위해서는 토마스 사도의 불신이 믿는 제자 들의 신앙보다 우리에게 유익합니다.” 6세기 대 그레 고리오 교황이라 불리는, 그레고리오 1세의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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