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멸망하지 않을 수도 있다
겸손기도 마진우 요셉 신부님
우리는 직장생활을 합니다. 직장을 다니면 월급을 받고 다니지 않으면 월급이 없습니다. 당연한 이치이지요. 그래서 그 월급을 꾸준히 받기 위해서 직장에 다닙니다. 월급이 없는데 직장을 다닐 이유는 없겠지요.
신앙은 무엇을 위해서 하는 것일까요? 신앙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즉 구원을 위해서 합니다. 구원에 도움이 되고 구원을 얻을 수 있기에 신앙생활이라는 것을 합니다. 구원이 없는데 신앙생활을 할 이유는 없지요.
그렇다면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이들은 왜 그럴까요?
먼저 신자가 아닌 이들은 구원이라는 것의 의미에 대해서 알지 못하기 때문에 신앙으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신앙생활은 아직은 다가서기 힘든 삶의 방식입니다. 그래서 다가오기 주저하게 되고 힘들어합니다. 그래서 이들은 구원이라는 것이 제대로 소개되고 선포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들의 구원의 몫은 사실상 기성 신자들에게 있습니다.
다음으로 신자인 이들은 구원이라는 것을 올바로 선포 받았는가 아닌가로 나뉩니다. 구원이라는 것에 대해서 올바로 선포받지 못한 채 신앙에서 멀어져 있다면 그들을 올바로 가르쳤어야 하는 이들에게 책임이 돌아갑니다. 예를 들어 아이들의 신앙의 엇나감은 가정에서 신앙의 전수가 올바로 이루어졌어야 하는 부모에게 그 책무가 돌아갑니다. 상황이 이런 지라 신앙에서 멀어져 있다고 해도 이들에게는 아직 올바른 구원의 선포에 대한 기회가 열려 있는 셈이고 그런 올바른 선포 뒤의 결정이 남아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신자들 가운데에서 구원에 대한 의미를 알면서 의식적으로 거부하고 있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스스로의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셈이고 알면서도 거부하기 때문에 구원의 가능성이 더욱 희박해지게 됩니다. 이들은 멀어져 있는 시간만큼 그 멀어짐이 더 강해지게 마련입니다.
신앙생활에 몸담고 있는 이들은 어떨까요? 이들도 상황이 간단한 것만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구원이라는 진정한 목적을 품고 신앙의 삶을 성실히 실행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구원이라는 것과 상관없는 '종교활동'에 몸담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 후자의 경우, 즉 구원과 상관 없이 종교활동을 하는 이들의 경우는 더욱 심각한 경우입니다. 이들은 흔히 위선자로 분류되는 이들입니다. 이들은 자신의 현세 생활을 위해서 신앙을 이용해 먹고 있는 경우가 됩니다. 이들은 거룩한 것을 현세적인 것으로 낮추어 사용하는 이들입니다.
구원으로 나아가지 않는 이들은 구원을 얻지 못합니다. 구원을 얻지 못한다는 것은 멸망에 이르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이 말의 무게감은 사람들에게 그다지 현실적으로 와 닿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직장을 잃는 것은 두려워해도 구원을 상실하는 것은 두려워하지 않는 경우가 참으로 많습니다. 왜냐하면 너무나도 간단한 이유는 그들에게는 하느님이 없는 존재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영혼 속에 하느님의 자리가 확고한 이들은 구원을 가장 우선적으로 확보하고 나머지를 필요에 따라 추구합니다. 하지만 영혼 속에 하느님의 자리가 없는 이들은 구원이라는 것은 허울 좋은 말마디일 뿐이고 세속적인 추구가 언제나 우선입니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했고 그것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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