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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삼용 요셉 신부님 | [주일복음 특강] 예수님께서 왜 당신이 직접 우리 죄를 용서해 주지 않으시고 교회에 그 권한을 위임하셨을까? I 연중 제23주일 강론 2023.9.10

松竹/김철이 2023. 9. 10. 07:15

주일복음 특강] 예수님께서 왜 당신이 직접 우리 죄를 용서해 주지 않으시고 교회에 그 권한을 위임하셨을까? I 연중 제23주일 강론 2023.9.10 I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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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 연중 제23주일 – 예수님께서 왜 당신이 직접 우리 죄를 용서해 주지 않으시고 교회에 그 권한을 위임하셨을까?

 오늘 복음은 매우 교회론적입니다. 왜 교회에 예수님께서 묶고 푸는 권한을 주셨는지 설명합니다. 누구의 죄든 먼저 혼자 가서 타이르고 안 되면 둘이나 셋이, 그것도 안 되면 교회에 알리라고 합니다. 어느 정도 개인이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말도 듣지 않으면 희망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당신께서 베드로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시며 하신 말씀처럼 교회에도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8,18)라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죄를 용서받지 못하면 당신께 오지 말라는 뜻입니다. 마치 아드님을 거치지 않고서는 아버지께 갈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에 반기를 든 사람이 마르틴 루터였습니다. 그는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죄 용서의 권한을 주셨을 리가 없다고 생각하고 그 권위를 부정하였습니다. 하느님을 믿으면 각자가 다 사제이기 때문에 직접 예수님께 죄를 용서받으면 된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교회에 죄 용서 권한을 주시고 파견하셨다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 이유를 두 가지로 정리해보고 싶습니다. 

 첫 번째 이유는 인간이 예수님께 죄를 용서받을 수는 있지만, 그것을 유용하게 될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만든 예수님을 상정해놓고 그냥 용서받을 것이라고 믿고 죄를 지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거짓말인 것처럼, 실제로는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하며 예수님께 용서받았다고 믿는 것도 거짓말입니다. 

  2003년 12월 19일, 당시 나이 24세였던 이 씨는 자신의 6살짜리 아들과 5살짜리 딸을 동작대교 위에서 한강으로 던져 죽게 하였습니다. 기자가 “왜 같이 안 죽었어요?”라고 물었을 때 그는 “기독교인이라서 자살은 못 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다시 기자가 “기독교인인데 사람 죽이는 건 괜찮아요?”라고 묻자 그는 “죄는 씻을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가 가톨릭 신자라면 그런 죄를 지을 수 있었을까요? 만약 자신이 한 행위를 직접 예수님이 아니라 사제에게 고백해야만 죄를 용서받을 수 있었다면 그럴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제보다 더 쉽게 본 것입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은 먼저 교회에서 죄를 용서받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교회 안에 흐르는 용서의 힘의 효과입니다. 인간에게 죄 용서의 힘을 주셨다면 나에게도 그 힘이 미치고 있음을 믿을 수 있습니다. 용서는 먼저 할 수 있다고 믿어야 할 수 있게 됩니다. 

 토니 던지는 미국 프로 미식축구 리그 역사상 최악의 팀들을 최고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결승에서 번번이 패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2005년 성탄절에 끔찍한 비극이 닥쳤습니다. 던지의 큰아들, 제이미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이상한 힘이 팀 전체를 감쌌습니다. 모두가 감독을 위로하기 위해 전적으로 감독을 믿고 최선을 다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그다음 해에 콜츠는 역사에 남을 명경기로 역전승하며 우승을 차지합니다. 

 피는 성령과 같습니다. 교회 안에도 용서의 힘인 그 피가 돌고 있습니다. 피는 모든 세포 안으로 스며듭니다. 그 피가 곧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누군가의 이름으로 모인다는 뜻은 그 본성으로 모인다는 뜻입니다. 개는 인간이 죽었을 때 모이지 않습니다. 본성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의 본성을 입었고 그 본성이 우리 심장에 피로서 돌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가더라도 그도 한 사람의 죄를 용서해 줄 힘이 있음을 믿을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걷는 것으로는 용기가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걸으면 나도 할 수 있다고 믿게 합니다. 그 용서의 권한이 인간에게 주어졌음을 믿는 믿음은 각 개인이 누군가를 용서하게 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그렇게 고정원 씨처럼 용서가 불가능하게 보이는 사람까지도 용서를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각 개인의 용서를 위한 힘은 용서의 권한이 주어진 교회의 일원이라는 믿음으로 강화됩니다. 이러한 이유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아닌 교회에 와서 용서받고 용서하도록 하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