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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삼용 요셉 신부님|말씀은 해석하는 것이 아니다 / 부활 제5주간 월요일/ 2023 05 08

松竹/김철이 2023. 5. 8. 07:35

말씀은 해석하는 것이 아니다 / 부활 제5주간 월요일/ 2023 05 08/ 전삼용 요셉 신부님
(클릭):https://www.youtube.com/watch?v=DrhZwYt3Z3w



가해 부활 제5주간 월요일 – 말씀은 해석하는 것이 아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요한 14,21)라고 하십니다. 주님의 계명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입니다. 곧 성경 말씀이 율법이고 하느님 뜻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씀에 순종하면 주님께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이시고 알게 하시겠다는 뜻입니다.
그렇지만 유다 지도자들은 그 성경 말씀을 공부했음에도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말씀을 해석하려 들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해석한다는 뜻은 내가 그 말씀을 한 이보다 위에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목소리를 듣는다”(요한 18,37)라고 하십니다. 하지만 빌라도는 “진리가 무엇이오?”(요한 18,38)라는 짤막한 질문으로 예수님과의 대화를 급하게 마무리했습니다. 진리란 세상이 창조된 원리입니다.
스마트폰의 원리는 그것을 창조한 인간만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원숭이가 스마트폰을 해석하려 든다면 어떨까요? 그냥 과일을 깨 먹는 도구로밖에 사용하지 못할 것입니다. 스마트폰을 만든 인간이 그 원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사용 설명서를 쓸 것인데 이것이 성경 말씀과 같습니다. 아이는 그 설명서에 순종하여 스마트폰을 사용해보면 그 원리를 이해하게 됩니다. 그렇게 진리가 그 아이에게 밝혀지는 것입니다. 순종하지 않고 설명서의 의미를 해석하려 든다면 자신이 그 스마트폰을 만든 사람보다 뛰어나서 스마트폰을 옳게 만들었는지를 심사하는 사람이 됩니다. 어떤 어린아이가 부모의 말을 해석할까요? 이해가 되지 않아도 순종합니다. 해석하려 드는 즉시 아이는 부모 위에 서게 됩니다.
이 세상은 하나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을 해석하는 방법은 사람 수만큼 많습니다. 각자가 하나인 세상을 각자의 주관대로 해석하여 어떤 사람은 세상은 돈이 없으면 안 되는 곳으로, 어떤 사람은 명예가 꺾이면 안 되는 것으로, 어떤 사람은 무시당하면 안 되는 곳으로, 어떤 사람은 마치 컴퓨터 게임과 같다고 믿어버립니다. 그리고 자신이 만든 세상에 자신을 맞추어 살고 그 세상에 합당하게 변해갑니다. 오직 성모 마리아만이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라는 ‘순종’의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하느님의 어머니가 된다는 천사의 말에 ‘인간이 어떻게 감히 하느님의 어머니가 될 수 있을까?’라며 말씀을 해석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성경 말씀을 묵상할 때 그것을 이해하거나 해석하고 분석하려 들지 말고 그냥 있는 그대로 순종하려 든다면 성령께서 임하십니다. 성령은 사랑이신데 사랑은 사랑할 자격을 갖춘 이에게 오십니다. 성모님께서 성령으로 말씀을 잉태하신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 비로소 말씀의 실체를 볼 수 있게 됩니다. 말씀을 이해하고 가르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한 어린 소년이 학교에서 편지 한 장을 가져왔습니다. 아이는 선생님이 편지를 줬다며 엄마에게 읽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잠시 뒤, 엄마는 눈물을 흘리며 큰 소리로 편지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당신의 아들은 천재입니다. 이 학교는 그를 가르치기에 너무 작은 학교이며 좋은 선생님도 없습니다. 당신이 아이를 가르쳐주기를 바랍니다.”
엄마는 교사의 말을 따랐습니다. 병에 걸려 죽는 순간까지 직접 아이를 가르쳤습니다.
어머니가 떠난 지 수 년이 지나, 아들은 유능한 발명가로 성장하였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아들은 어머니의 유품들을 돌아보고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선생님이 어머니에게 보냈던 그 편지도 놓여있었습니다. 그는 편지를 펴서 다시 읽어보았습니다.
“당신의 아들은 저능아입니다. 우리 학교는 더 이상 이 아이를 받아줄 수 없습니다. 아이에게 퇴학 처분을 내립니다.”
아들은 편지를 읽고 눈물을 쏟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다이어리에 다음과 같이 써 내려갔습니다.
“토머스 에디슨은 저능아였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그를 이 시대의 천재로 변화시켰다.”


이 이야기는 토머스 에디슨의 어린 시절에 관한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일화입니다. 실제로 에디슨의 어린 시절에 관한 공식 기록에서는 이러한 사건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역사적 사실은 한쪽 귀가 안 들리고 몸도 온전치 못한데 쓸데없는 호기심만 많은 아이를 무시하는 학교와 선생님들에게 화가 난 어머니가 아이를 집에서 직접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아이의 머리가 썩었다느냐 저능아라느니 아이를 무시했지만, 어머니만이 그를 이해해주고 믿어주었습니다. 아이는 선생님이 아닌 어머니 낸시의 말을 믿고 순종했습니다. 그리고 결국엔 자신이 믿는 대로 되었습니다.
어머니만큼 자녀를 사랑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니 어머니의 말씀은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믿고 순종해야 합니다. 사랑의 말씀은 그런 것입니다. 하느님만큼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우리를 만드시고 낳으셨기 때문입니다. 누구든 자신이 피땀 흘려 만든 작품을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자녀는 자신을 사랑하는 창조자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결국 창조자의 본 모습을 알아보게 됩니다. 왜냐하면 창조자의 사랑이 피조물 안에 머물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이 ‘성령’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요한 14,23)라고 하십니다. 이는 마치 하느님의 말씀에 “아멘!”(Fiat)이라고 하시는 성모 마리아께 하느님께서 잉태되시는 것과 같습니다. 성모 마리아 안에 말씀을 잉태하게 하신 성령께서는 이제 성모 마리아께서 방문하신 엘리사벳도 성령으로 가득 차서 태중의 아기도 기뻐 뛰게 하셨습니다. 에디슨도 어머니의 말씀을 받아들였고 그 사랑의 힘으로 커다란 업적을 이뤄내고 기뻤을 것입니다. 이 기쁨이 성령께서 함께하시고 말씀을 비로소 이해하게 되었다는 증거입니다.
성모님께서 ‘마니피캇’을 노래하실 때가 하느님께서 당신을 드러내심을 바라보는 순간입니다. 에디슨이 “얘야, 너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단다”라는 어머니의 말씀을 정말 실현하고 나서야 어머니의 마음을 볼 수 있게 된 것처럼, 우리도 하느님의 말씀에 먼저 순종하고 나서야 그 뜻을 이해하고 그렇게 말씀하신 분의 마음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을 보아야 진정으로 그 사람을 본 것입니다.
진리는 하나입니다. 말씀 묵상이란 말씀을 해석하기 위함이 아닌 말씀에 순종하기 위한 작업입니다. 성모 마리아께서 가브리엘 천사의 인사말을 듣고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지 곰곰이 생각하였다”(루카 1,29)라고 한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해석하기 위함이 아니라 순종해야 할 것인지 말아야 할 것인지 결정하기 위한 목적이었습니다.
믿음의 순종은 이해가 되어서가 아니라 겸손해서 이뤄질 수 있는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분의 말씀은 순종하였을 때 ‘기쁨’의 열매가 맺힙니다. 그럼으로써 진정 그 말씀을 하신 분의 본모습을 볼 수 있게 됩니다. 묵상을 통해 성경에서 어떤 새로운 진리를 찾아내려 하는 것은 어리석습니다. 말씀에 순종하기에 합당한 겸손을 기르기 위함이 묵상기도의 목적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다음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고,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다. 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요한 13,16-17)라고 하신 말씀은 해석이 아닌 순종해야만 행복할 것이란 뜻입니다. 진리의 본모습은 이렇게 순종하는 이에게서 드러나고 자기가 만든 거짓된 세상에서가 아닌 진리의 세상 안에서 사는 사람은 그 창조자의 목적대로 변화되어갑니다.